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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Mar 08. 2020

김동인과 ‘중국 혐오’

신문학이 시작된 이래 우리는 대개 중국을 부정적으로 그려왔다. 청일전쟁이 배경이 된 최초의 신소설 「혈의루」에서, 전쟁 당사자인 청과 일본이 모두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각축을 벌인 외세라는 점에서 동일함에도, 작가 이인직은 일본은 아주 호의적으로 그린 반면, 중국은 대단히 부정적으로 그린다.


신문학을 이끈 이광수는 우리의 고전문학을 저주하다시피 부정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모조리 중국을 모방해 사대주의적이고 봉건적인 질곡에 빠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 신문학은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서구문학을 따라야 한다고 강변한다. 


김동인도 알게 모르게 중국에 부정적 또는 혐오의 태도를 드러낸다. 당장 「감자」(1925)에서 칼부림으로 복녀를 살인하는 이가 다름 아닌 중국인 왕 서방이다. 중국 유학생들에게 이 부분을 강의할 때 조금 조심스럽긴 하다.


평양이 무대인 「감자」에 왕 서방이 등장하는 건 우연은 아니다. 이 시기 조선의 화교 농사꾼들은 왕 서방같이 대부분 채소밭 농사를 짓는데, 그중에서도 평양 내 채소 수요의 대부분을 이들 화교가 공급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중국인의 직업 침탈”이라는 제목으로 이들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기도 한다.(이정희, 『한반도 화교사』) 


화교들이 조선인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피해의식이 「감자」에서 돈 많고 음흉한 왕 서방을 등장시키게 된 건 아닌가 하는 판단이다. 복녀가 새 여자를 얻은 왕 서방에게 강짜를 부리면서 “이 되놈 죽어라!”하고 악다구니를 쓸 때, 중국인에 대한 작가의 불편한 심기가 숨어있음에 틀림없다. 참고로 김동인은 평양 사람이다.


1932년에 발표된 김동인의 「붉은 산」은 그 혐오감이 어떤 식으로 발전하는지를 보게 된다. 「붉은 산」은 중학교 다니던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렸는데, 아마도 그 민족주의적 내용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실제 김동인은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이다. 그는 오히려 민족주의 내지 계몽주의를 문학의 슬로건으로 삼았던 이광수를 늘 비웃고 조롱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광수가 만일 「감자」를 썼더라면 감자를 훔치러 가는 복녀를 도산 안창호 같은 이와 우연히 만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산의 손을 잡고 교회도 나가고 일본서 공부하고 돌아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신여성으로 변신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동인은 복녀를 잔인하게 죽여 버린다. 그런 김동인이 「붉은 산」에서는 웬 민족주의란 말인가?


학생들은 눈치를 못 채겠지만 이미 학계서는 「붉은 산」의 비밀이 알려져 왔다. 「붉은 산」은 만주 조선인 마을을 무대로 ‘삵’이라는 조선인 불량배가 등장한다. 삵은 노름, 칼부림에, 색시들을 욕보이고 다녀 마을 사람들의 기피 대상이다. 그런데 조선인 노인네가 소출 문제로 중국인 지주에게 따지다 죽임을 당하자, 삵은 마을 사람들을 대신해 중국인에게 항의하러 갔다가 역시 죽음에 이른다.


삵은 숨을 거두면서 ‘붉은 산’과 ‘흰옷’이 보고 싶다며 애국가를 부르는데,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가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숙연히 합창하는 것으로 끝난다. 개차반 삵이 밑도 끝도 없이 헌신적 영웅으로 바뀌는 것도 황당하지만, 조선인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마지막 장면이 일제의 검열에 걸리지 않은 것도 신기한 일이다. 


 「붉은 산」이 발표되기 전 해인 1931년, 중국 길림성 만보산 지역서 관개수로 문제로 한‧중 농민 간 갈등이 발생한다. 일본은 중국 측 불만을 무시하고, 우리 농민을 부추겨 양쪽의 충돌이 있었지만 조선인 사상자는 없었다. 그러나 일제가 이 사건을 확대하고 국내 언론도 ‘가짜 뉴스’를 전하며 반중 감정이 일고 인천, 서울 등서 화교 테러사태가 벌어진다. 「감자」의 무대인 평양서는 중국인의 유혈이 낭자할 정도였다. 혐오가 폭력으로 변한 것이다!


덕분에 일제는 조선인의 항일의식을 반중 감정으로 돌려 양 민족을 이간하고, 그해 가을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중국인에게 희생당하는 조선인을 그린 「붉은 산」은 일제에 교묘히 협력한 작품이다! 


「붉은 산」이 발표되기 직전 1931년 가을 만주사변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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