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의 「만세전」(1922)은 제목이 말하듯이, ‘만세’ 즉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8년 겨울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인 동경유학생 ‘이인화’는 기말시험을 앞두고 고국의 아내가 해산 후유증으로 죽음에 임박했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 채비를 차린다. 작품의 주요 내용은 마치 ‘로드 무비’와도 같이 동경을 떠난 이인화가 서울로 가는 길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식민지 조선의 여러 모습들이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장면 중 하나가 시모노세키서 부산으로 오는 ‘관부연락선’의 목욕탕에서 일본인 승객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엿듣게 되는 장면이다. 일본인들의 화제는 조선으로 건너가 노동자들을 모집하러 다니는 사업 이야기였다.
노동자 모집원 아니 ‘브로커’가 벌이는 사업은 "내지(일본)의 각 회사와 연락하여야 가지고 요보(조선인)들을 붙들어 오는 것"이다. 브로커는 노동자를 모으러 조선을 가게 되면 회사에서 여비와 일당도 받거니와, 모집 1인당 1~2원의 수당을 받는다. 단 방적회사 여공보다는 광부를 모집하면 더 많은 수당을 받는데, 한 번은 조선인들 8백 명을 북해도 탄광으로 보내 근 2천 원 돈을 벌었다고 자랑한다.
모두들 브로커를 부러워하는 가운데, "조선 농군들이 가서 그런 공사일은 잘들 하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그는 그것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일본 회사가 노동자들의 빚을 갚아주고, 여비도 대고, 처자까지 데리고 갈 수 있도록 해줘, 이들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단 일본으로 가면 임금이 헐하든 일이 고되든 영락없이 “독 안에 든 쥐”가 되고 만다고 한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말이 ‘이주노동자’이지 이를테면 ‘채무노예’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일본인들 역시 이런 일들이 불법의 요소를 갖고 위험한 일이라는 건 아는지, "촌에 들어가면 위험하지 않은가요?"라는 다른 이들의 질문에 모집원은 “요보는 온순한 데다가 도처에 순사요, 헌병인데 손 하나 꼼짝할 수 있냐?”면서 자신들의 탄탄한 식민지 통치를 자랑스러워한다.
주인공은 이 말고도 경부선 역 인근마다 조선인들의 빼앗긴 삶의 터전으로 새로이 들어서는 일본인 가옥, 또 이들로 번화해진 거리와 새로 난 전찻길에 신나 하는 “흰 옷 입은 불쌍한 운명”의 백성들과 부닥친다. 김천역에서 마중 나온 "보통학교 훈도"(지금으로 말하면 초등학교 선생)인 주인공의 형은 금테 모자에 망토를 두르고 환도를 찼는데, 헌병보조원에게 경례를 척 붙이는 모습에서 이 시대가 이른바 ‘무단정치’의 시대임을 실감케 한다.
평론가 임화가 「만세전」을 1920년대 사실주의 소설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했는데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나는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면서 「만세전」에서 식민지 조선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을 각자의 생각으로 골라보라 하고, 과제물 제출 후에는 내가 고른 장면을 참고로 얘기해주는데 글쎄 학생들의 공감은 반반인 것 같다.
이인화가 경부선 열차를 타고 가던 중 자정이나 넘은 시간에 대전역에서 잠시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플랫폼엔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발이 날리는데 주인공은, 불이 훤하게 밝힌 차장실에서 두루마기를 입은 조선인 청년들이 가슴에 권총을 드리운 헌병 앞에서 겉으론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공포에 질려있는 모습을 본다.
대합실 밖에는 눈발이 쳐들고 순사들이 지키는 가운데 몇몇의 죄인들이 결박 진 채로 앉아 있다. 그중 한 아낙네는 옷매무새는 다 흐트러진 채 뒤에 쌕쌕 자는 아이를 매달고 있다. 작가는 그들 모두가 무슨 연유로 그렇게들 하고 있는지 한마디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떤 역사책도, 사회과학 책도 「만세전」의 이 장면만큼 당대 식민지 현실을 가슴 저리게 보여주는 예도 없는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