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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Mar 15. 2020

‘가난’을 가르치며

중학생 때 한국문학전집을 처음 접하고 식민지 시대 우리 소설을 읽으면서 하도 가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소설이라면 의당 가난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으로만 알았다. 나 역시 가난을 소재로 소설을 쓰고 싶었건만 불행히도(?) 나는 집안이 유복한 편이었다.


소재를 얻고자 가난한 친구의 집도 찾았지만 그 집에서 밥을 먹으라고 하면 비위가 약해 핑계를 대고 얼른 돌아 나왔다. 인천 부두 가난한 동네서 살던 급우가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했다. 담임 선생님과 함께 문상을 갔는데, 집 앞에 놓인 사잣밥을 보고 오랜동안 숙주나물을 못 먹었던 기억도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학생들에게 소설 속 인물들의 가난한 상황을 제대로 설명 못할 법도 하나, 역시 뛰어난 소설들은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운수 좋은 날」(1924)에서 설렁탕 국물이 먹고 싶다는 병든 아내에게 갖은 욕을 해대며 일을 나오는 김 첨지가, 아내에게 약을 쓰고 싶어도 “병이란 놈에게 약을 주어 보내면 재미를 붙여서 자꾸 올”까 겁이 나서 약을 못 쓴다는 말에 가난한 이들의 절박한 처지를 저절로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당시 유학생 또는 동인지 작가들은 대개가 가난을 몸으로 체험한 것은 아니기에 내가 보기에도 어설프게 가난을 그린 게 태반이다.   


단 ‘빈궁 문학’으로 유명한 최서해는 그들과는 다르다. 그는 가난으로 보통학교도 중도하차하고 한때 간도 땅으로 넘어가 별의별 험한 일을 다 했다. 그는 일생을 통해 네 번 결혼했는데, 처음 여자는 애정문제로 헤어졌지만, 두 번째 여자는 가난으로 사별하고, 세 번째 여자는 가난 때문에 도망쳤다. 그 역시 서른을 조금 넘어 지병인 위 협착증으로 사망했는데, 그는 자신의 살아온 이력을 써내면 곧 소설이 된다는 부러움 아닌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무서운 인상」(1926)은 아마도 작가가 정거장서 하역 일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인 듯싶다. 간도에서 화물열차로 실려 온 콩 가마니들을 실어 나르는 일이었는데, 이런 하역노동자들과 함께 ‘콩쓸이’라는 일꾼들도 등장한다. 곡식 섬이 터지면 땅바닥에 조, 콩들이 수북이 흐르는데 그걸 쓸어 모으는 자들이 콩쓸이다.


콩쓸이 중에는 칠십 가까운 노파도 있었는데, 그 노파는 눈이 어두워 어떤 때는 돌을 콩이라 줍기도 했다. 그 노파가 기차에서 흐른 콩알이 선로에 있는 걸 보고 내려갔다가, 구내서 입환(入換)하는 열차에 치어 죽는 사고가 난다. 차바퀴에 머리로부터 어슷하게 왼쪽 가슴까지 쳤는데 머리가 부서져 두부를 짓이긴 듯한 얼굴이 흩어진 것을 목도했던 화자는 노파의 그 ‘무서운 인상’을 평생 잊지 못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가슴을 아프게 하는 가난 이야기는 가난으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헤어짐의 불행을 겪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최서해의 「백금」(1926)의 백금(白琴)은 소설 속 ‘나’의 사랑스러운 딸아이 이름이다.


백금이 네 살 되던 해, 나는 먹고살 길을 찾아 식구들과 헤어져 서울로 떠나오는데, 곧 아내가 어머니와 딸을 놔두고 도망쳤다는 소식과 함께 얼마 후 백금이 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런데 백금이 가 “죽을 때 약을 안 먹으려고 떼를 쓰다가, 백금아 이 약을 먹고 아버지 있는 데로 가자! 하니까 벌떡 일어나서 꿀꺽꿀꺽 마시더래요!”라는 말을 전해 듣는다. 


언젠가 이 부분을 강의할 때 마침 딸애가 백금이 또래일 때라 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나는 가난이라는 것을 소설책이나 통해 알아봤을까 하는 책상물림이지만 가난으로 가족들이 헤어지고 흩어지는 것은 마치 내 일 같아 늘 가슴이 아프다. 이런 소설들은 고통스러워 피하고 싶다.


화가 밀레는 자신은 결코 고통 없이 지내지 않겠다며, 고통은 예술가들 자신을 가장 정열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라 했다. 그의 그림에는 콩쓸이 대신 곡식을 산더미 같이 쌓은 지주의 수레를 원경으로, 이삭을 줍는 가난한 여인들이 나온다.   






이삭 줍는 가난한 여인들 멀리 산더미 같이 낟가리가 쌓인 지주의 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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