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과 황해도 동척 농장 사건

by 양문규

1924년 말 김소월은 소설가가 아님에도 또 평소의 그 답지 않게 당시 일어났던 사회적 사건을 소재로 두 편의 시를 발표했다.


소월은 천하가 아는 울보(?) 시인이다. 물론 울보라고 흉은 봤지만 「초혼」 같은 시를 읊노라면 시인의 한없는 절망과 비애에 숨이 다 멎을 정도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시에서 “죽지 못해 사는”(「어버이」) 것이 인생이라 했고, 또 어떤 시에서는 인생을 “칼날 우에 춤추는”(「고락」) 것이라 비유하기도 했는데, 우리는 소월이 무엇 때문에 이리도 인생에 슬퍼하고 절망했는지 그 이유가 늘 궁금해진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를 소월의 개인적 전기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소월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아버지는 정신이상의 폐인이었다. 아버지가 있음에도 그 구실을 못하는 아버지의 실질적인 부재가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시대 속에서 그 의미가 복합되어 절망적 태도를 갖게 했다는 식의 설명이다. 전통적 상징에 의하면 조국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급기야 소월은 술에 아편을 타서 서른 두 해의 생명을 갖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소월의 말년은 외롭고 힘겨웠는지, 그의 아내는 소월의 강권에 못 이겨 자주 반주를 같이 했다고 한다. 어떤 때는 아내가 그를 따라 장터 선술집에까지 동행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그가 돌아오는 길에 대로상에서 몸부림치듯이 춤을 추고는 하였다고 한다. 심한 우울증을 앓았던 게 아닌가 하는 짐작도 드는데, 주워들은 몇 가지 이야기로 그의 삶을 뭐라 규정짓긴 어렵고 결국은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삶의 일단을 짐작해볼 수밖에 없다.


1924년 말 정확히 1924년 11월 24일과 이듬해인 1월 1일 소월은 「나무리벌 노래」와 「옷과 밥과 자유」라는 두 편의 시를 『동아일보』에 연속적으로 발표했다. 이 시들은 고향을 등지고 만주·봉천 등지로 이주해야 했던 농민의 비극을 그린다. 이들이 이주하게 된 구체적 사연이 제시되지는 않지만 소월 특유의 민요조로 극도로 압축된 진술을 통해 이주 농민의 고통과 비애가 한스럽게 노래된다. 소월 시가 보편적 인간의 비애와 한을 그리기는 해도, 이렇게 이주 농민의 한을 그린 예는 없어 그 창작 동기 또는 배경이 궁금했었다.


평소부터 관심 있던 역사학자 김용섭 교수의 논문 「한말 일제하의 지주제의 사례」를 읽다가, ‘재령’이라는 지명이 눈에 확 들어왔다. 황해도의 재령과 연백평야는 북쪽의 곡창지대다. 그중 재령평야의 ‘여물(餘物)’리 농장은, 소월 시에 등장하는 먹고 남아도는 풍요로운 땅이라는 뜻의 ‘나무리벌’ 농장을 가리킨다.


논문에 따르면 이 농장은 원래 조선시대 궁장토(왕실 농장)였으나, 식민지배가 시작되면서 일본 동양척식 주식회사(동척)의 토지로 수용된다. 궁장토 시절엔 3할이던 소작료가 동척으로 넘어오면서 최고 8할까지 오르고, 생산증대를 위한 신품종, 비료대금까지 소작농이 부담하면서 심각한 농민 착취가 이뤄진다.


드디어 1924년 가을 400여 명의 소작인은 견디다 못해 일본인 지주와 충돌하는데,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게 지주가 소작인에게 총을 발포하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결국 소작인들은 쟁의에 실패하고 370여 명의 소작인이 만주로 이산하는 비참한 결과를 내고 쟁의는 끝난다.


김 교수의 논문에는 당시 쟁의 사건의 경과를 알리는 『동아일보』의 기사가 상세히 인용된다.


소월은 그의 고향 평안도에서 한때 『동아일보』 지국을 열기도 했는데, 단순히 신문보급소 일만이 아니라 지역 소식을 알리는 주재원 비슷한 일도 겸했던 것 같다. 그는 같은 서도(西道)인으로 황해도 지역서 일어난 쟁의 사건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고 그 관심이 『동아일보』에 두 편의 시를 쓰게 된 배경이 아니었나 싶다.


1920년대 초 시는 물론 어느 소설 작품도 소작쟁의 같은 사건을 다루지 않는데, 소월이 유독 이와 관련된 비극적 사태를 작품화한 것을 보며 우리는 그가 왜 그렇게 현실에 절망했는지, 그에 대한 조그만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재령평야.png 황해도 재령평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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