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남천(1911~?)은 일반인들에게는 좀 낯서나, 한국문학 연구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평안도 출생으로 해방 후에는 북쪽으로 갔는데, 1953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처형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식민지 시기 많은 평론 활동을 하고 다양한 주제의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그중 『대하』(1939)는, 박경리의 『토지』 같은 이른바 ‘가족사 소설’의 기원이 되는 작품이다. 앞서 등장한 염상섭의 『삼대』(1931)를 가족사 소설로 부르는 이도 있지만, 『삼대』는 동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통시적 또는 역사적 기술 방식을 취하고 있지도 않다.
『대하』는 개화기를 출발점으로, 평안도 상인 ‘박성권’ 집안의 가족사를 그려나간다. 박성권의 세 아들 중 서자 출신인 ‘형걸’이 중심인물인데, 이 젊은이가 어떻게 문명개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근대적 인간으로 탄생하는지, 그리고 그가 성장해가는 초기 과정에 기독교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이야기 곳곳에 당시 평안도 지방에 들어온 기독교와 관련된 풍경들이 그려지는데, 마리아를 ‘예수 오마니’라 부르고, 예수를 ‘텁석부리 목수 아들’이라 칭하는 대목에서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이 소설은 아쉽게도 완성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대하』가 일제시기 출간된 작품 중 가장 먼저 서양에 소개되었다. 흥미로운 건 영어가 아니라 체코어로다. 남북한 국가가 세워지기도 전인 194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출간되는데, 번역자는 한흥수(1909-?)라는 이다. 한흥수는 식민지 시기인 1936년 오스트리아 비인 대학으로 유학을 간다.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방하자 지도교수를 좇아 중립국인 스위스의 프리보르그 대학으로 옮겨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후 그는 비인 인류학 박물관서 일하는데, 1942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동양학 연구소 일에 관여하게 되면서 한 달에 한 번 꼴로 비인과 프라하를 오간다. 기차로 4시간 남짓 걸리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한흥수는 체코의 동양학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그곳 동양학 연구소에 한국어 강좌를 개설한다. 그리고 체코가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된 후에는 아예 프라하에서 머물게 되는데, 한국인 관광객들이 잘 가는 프라하 찰스 교 아래 블타바 강의 캄파 섬에는 한흥수가 살던 아름다운 저택이 남아 있다.
이 시기 한흥수는 그의 한국어 제자인 풀트르(A. Pultr, 1906~1992)와 함께 『대하』를 번역한다. 풀트르는 이후 1950년 찰스대학에 한국학과를 설립하는데, 올해가 체코에 한국학이 개설된 지 70년 되는 해다. 한흥수는 이미 그전에 프라하를 떠나 평양으로 가 북한 고고학계에서 명성을 얻는데, 1952년 이후 공식석상에서 사라진다.
한흥수가 『대하』를 번역하게 된 데는, 작가 김남천과의 개인적 인연이 있었던 것 때문으로도 짐작되나, 『대하』는 당시 기독교 및 서구 문명과 맞부닥뜨린 평안도 전통사회의 풍속을 다채롭게 그리고 있어,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관심을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김남천이 『대하』를 창작하게 된 데에는, 중국인 왕릉 일가의 가족사를 그린 펄 벅의 『대지』가 1938년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도 한몫을 했으니, 당시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관심이 이러한 소설 작품들을 계기로 크게 증폭이 되었을 것이다.
체코에서 발간된 『대하』의 표지화 역시 작품 내용과 크게 관계없이 쪽을 지고 한복을 입은 조선 여인의 모습을 담고 있어, 서양인들의 동양에 대한 호기심을 엿보게 한다. 『대하』에서 선교사가 세운 신식학교를 다니는 형걸이 서자로서의 울분을 풀고자 ‘단발’을 결행한다든지, 마을로 전도를 하러 나갔다가 만나게 된 기생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서양인들에게 흥밋거리가 됐을 법하다.
『대하』 는 비단 서양인들뿐만 아니라, 당시 서양 문물과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서양인 선교사들에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어졌던 평안도 지역의 개화기 풍경을 알고 싶어 하는 우리 국내 독자들에게도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