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미지의 이성을 만나 연애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작은 인연이라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로망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해외여행을 간 것은 이미 중년의 나이를 훨씬 넘어서고, 그것도 늘 아내와 함께 했기에 언감생심 그런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럼에도 체코에 가서 일 년을 체류하게 됐을 때, 동구의 여인들에 대해 가져왔던 나름의 환상으로 내심 기대가 컸다.
뜻밖에도 체코에 가서 그곳 여자들에게서 놀랐던 것은 아내도 동의한 사실이지만 엄청나게 큰 가슴 때문이었다. 사실 이런 얘기 꺼내기가 좀 민망하지만, 자신 있게 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아주 오래 전인 1936년, 오스트리아 비인으로 유학을 간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자 한흥수라는 이가 있다. 그는 당시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가는데, 이 여행기를 당시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그는 유럽으로 가던 중 모스크바에 며칠 머물면서, 그곳 공원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여인들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나 보다.
그가 이 여인들을 본 감상을 그대로 옮기면, “대체로 여자들은 건장하고 대형이다. 특히 상체 중에도 유방이 거대해서 징글맞게 보인다.”라고 썼다. 그가 이 얘기를 여러 군데서 몇 번이나 반복하는 걸로 봐서, 내가 받은 충격은 저리 가라였던 것 같다.
가슴을 떠나 러시아나 체코 등의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상상불허의 늘씬한 여인들은 우리를 압도한다. 단 체코 미인들은 선이 강하고 아름다운 남성의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그게 외려 독수리같이 무서워 보일 때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구의 여인들을 선호하는 것 같은데, 현재 부인은 슬로베니아 여자이고, 처음 부인은 체코의 모라비아 쪽 출신이다.
모라비아는 슬로바키아와 인접한 지역인데,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는 한때 모라비아 왕국의 중심부였다. 체코 여인 열 명 중 하나는 미인인데 이는 반드시 슬로바키아 출신이고, 슬로바키아 여인 열 명 중 하나는 인물이 없는데 이는 체코 출신이라는 우스갯말도 있다. 이 얘기를 어디서 주워듣고 이곳 여행을 하면서 아내에게 해줬더니, 자기는 오히려 슬로바키아 남자들이 그렇게 멋있다며 풍경 사진을 찍는 척하면서 그곳 남자들을 적잖이 ‘도촬’했다.
식자우환이라고 나는, 내가 아는 동구 나라의 알량한 지식들을 가지고 그곳 여인들의 얼굴을 품평하는 예도 많으니 이런 얘긴 믿거나 말거나이다. 헝가리는 원래 유럽 인종이 아니라서 그런지, 검은색 머리와 눈동자에 가늘고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여인들이 자주 눈에 띈다.
폴란드는 러시아 등의 이웃 강대국에 오랫동안 시달린 탓인지(?) 여인들 체격도 소하고 아담한 편이다. 식민지 시절 파리로 공부하러 갔던 여성화가 나혜석도, “폴란드 사람들은 남녀 간에 인물이 동굴 납작하고 귀염성스럽게 생기고 모두 단아한 맛이 있다.”라고 했다. 여성과의 스캔들이 많았던 헝가리 작곡가 리스트는, “쇼팽의 마주르카에 배어있는 감성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싶다면 폴란드 여성들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쇼팽의 마주르카 피아노곡들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애잔함과 귀여운 요염함은 꼭 폴란드 여인이다.
폴란드와 인접한 벨라루스 역시 강대국의 침략으로 많은 수난을 당한 나라다.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군대들이 러시아를 쳐들어가고 퇴각할 때 바로 이 나라를 거치면서 격전을 치렀기에 유독 희생이 컸다. 이곳 여인들도 대국 러시아와 달리 체격이 아담한 편이다. 특히 여인들이 상냥하고 착해서, 이곳에선 아내를 어디 놔두고 혼자 여행하고 싶었다. 그러나 호텔서 방값 흥정을 할 때 매몰차게 내쏘던 그곳 여직원을 생각하면 나의 이러한 판단들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것인가를 되묻게 된다. 그래서 말인데 여기서 한 얘기들은 하나도 믿을 게 없고, 단지 여행 당시 만났던 익명의 여인들을 추억하는 재미로 이 이야기를 썼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