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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리니든, 정동진이든

by 양문규

아테네에서 이스탄불로 가는 도중, 산토리니로 가는 저가항공 노선이 있어, 그곳을 둘렀다. 산토리니는 그리스와 터키 사이, 에게 바다에 떠있는 수많은 섬들 중 하나다. 여름에는 배를 이용해 가기도 하지만, 2월은 비수기인지라 비행기로 갔다. 섬 안에서는 대중교통이 불편해 주로 택시를 이용해 다녔는데, 한 그리스인 택시기사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이곳엔 터키 사람들도 많이 산다는 얘기를 해줬다. 왜 아니겠는가! 그 먼 트로이 전쟁 시절부터 에게 바다를 사이에 두고 양쪽 지역 간 벌어진 주도권 싸움이 유명하지 않은가!


택시기사에게 당신은 원래 산토리니 출신이냐고 물으니, 택시 창 너머 수평선 쪽으로 길게 누운 섬을 가리키며 저어기 낙소스 섬이 자기 고향이란다. 순간 내가 바야흐로 신화들의 장소에 와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낙소스 섬은 바쿠스(디오니소스) 신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그리스 왕자 테세우스가 해변에 버리고 간 크레타 섬의 공주 아리아드네를 바쿠스가 구해준 곳으로 더 유명한 섬이다.


바쿠스와 아리아드네.jpg 런던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가 그린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그림에 칠해진 바다와 하늘 색깔이 바로 산토리니의 바다와 하늘 그것이다. 그런 색깔의 하늘과 바다가 있기에 신화의 얘기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산토리니의 바다는 아침 녘에는 약간의 동요를 보이나, 정오로 갈수록 숨이 막힐 듯이 정지해버린다. 하늘과 바다는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파랗게 짙어져 그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현실 같지 않다. 절벽의 하얀 집과 푸른 지붕의 교회들은 어찌 보면 테마파크 속 건물 같기도 하지만 압도적인 바다와 하늘, 태양 때문에 빛난다.


KakaoTalk_20160229_204147089.jpg 산토리니 정오의 바다


내가 떠나온 강릉은 태백산맥과 동해바다가 만나는 곳이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지만, 서해가 삶이 있는 문명의 바다라면, 남해는 호수와도 같고, 이에 비해 동해는 신화의 바다로 산토리니의 느낌이 물씬 난다.

그래서 그곳이 정동진이든 동해 바닷가 어디든, 강릉 태수로 부임받은 남편을 쫓아 바닷길을 따라가던 수로부인에게 노인이 낭떠러지로 올라 꽃을 꺾어다 바치기도 하고, 동해의 용왕은 그녀의 미모에 반해 납치해가는 신화도 탄생한다.


KakaoTalk_20160304_215835651.jpg 산토리니의 일몰



정동진은 일출로 유명하나, 산토리니는 일몰의 경관으로 유명하다. 일몰이나 일출이나 그 풍경들은 신화와도 같아 그 순간엔 한 번쯤 삶의 근원을 생각해보게 한다. 여행이란 바로 일상을 떠나 이러한 근원을 향하고자 하는 마음과 몸짓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만일 이런 근원과 영원을 향한 염원만이 있고, 돌아갈 일상이 없다면 허탈하고 무섭기까지 할 것 같다.


산토리니에서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나면 섬들은 윤곽만을 남기고 모든 바다는 아쉬움으로 끝난다. 그러나 달이 뜨고 섬의 골목마다 작은 불빛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우리는 다시 일상의 안온함으로 돌아온다. 2월 22일 밤 우리 부부는 산토리니의 숙소에서 그곳 석양빛을 닮은 ‘빈 산토’ 와인으로 결혼기념일을 자축했다.

산토리니의 석양빛을 닮은 빈산토 와인


정동진 역시 일출의 장엄함이 펼쳐지나, 바로 옆 낙가사(洛伽寺) 아래 등명(燈明) 마을은 그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등명 마을은, “낮에는 눈부셔 눈뜨지 않는 해안에 없는 듯 엎드려” 있다가, 오징어 배 불빛들이 수평선으로 나타날 때면 “연등으로 살아”난다.(이문재, 「저녁 등명」) 나는 늦은 밤 자주 등명 마을의 가물거리는 불빛 속에서 강릉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산토리니든 정동진이든 모두 신화와도 같이 아름다운 곳이지만, 전자는 쉽게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더 신비롭고 그리울 수도 있겠다. 거꾸로 우리와는 먼 나라 사람들이 동해 바다를 갔다 오고 나면 그 역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남아 있게 될지도 모른다. 강릉 해변을 나가 보면 산토리니를 흉내 낸 카페들이 더러 눈에 띈다. 카페 주인 나름대로 다 사연을 갖고 꾸몄겠지만 굳이 그런 흉내를 낼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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