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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작은 온천도시 ‘포뎨브라디’를 떠올리며

by 양문규

체코 가기 전엔 몰랐는데 그곳에는 의외로 온천도시들이 많았다. 그중 몇몇 온천지는 유럽의 황제들을 비롯해 많은 유명 인사들이 다녀간 곳으로 이름이 나있다. 가령 카를로비 바리(카를스 바트) 온천은 이름부터가 “카를 황제의 온천”이라는 뜻으로, 황제들 말고도 대표적으로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수차례 다녀간 곳이다. 또 테플리츠 온천은 악성 베토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황제와 ‘시시’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그의 부인 엘리자베트 왕후가 찾았던 곳이다. 오늘 얘기하려는 포뎨브라디(Poděbrady)는 그런 유명인들이 다녀간 곳은 아니고, 자그마한 온천도시로 프라하서 동쪽으로 기차를 타고 한, 두 시간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 도시에는 과거 그곳 영주의 이름을 딴 포뎨브라디 성채가 남아있고, 광장 한편으론 체코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페스트 탑, 아니 18세기 당시 전염병 퇴치를 기념하여 세운 마리안 탑 등이 그나마 볼거리로 남아있다. 물론 온천장임을 알리는 검회색 돔 지붕의 원통형 건물과 열주(列柱)로 이어지는 ‘콜로나다’ 양식의 건물도 있고 시내 곳곳에는 온천 약수를 받아가는 수도 시설들이 있다. 가끔은 중년의 여인들이 떠들썩하게 몰려다니는데, 이 나라에선 온천이 싱글 여인들의 파티 장소로 많이 쓰인다는 얘기를 들었다. 또 이런 이들을 상대로 한 보헤미아 산 크리스털 그릇 할인 매장들도 있어 프라하 사람들이 일부러 이곳을 찾는다고도 한다.


개인적 얘기를 하나 꺼내자면 나는 결혼 당시 시간강사 신분에 별 여유도 없던 탓에 신혼여행을 제주도 대신 유성온천으로 다녀왔다. 막상 그곳을 가보니 신혼보다는 재혼 아니면 불륜으로 의심되는 커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우리 온천지가 식민지 시기 일본 영향 아래 집중적으로 개발되고 각광을 받아 유락의 성격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 기분도 영 안 나서 그냥 당일로 돌아왔는데, 덕분에 남은 돈으로 연탄과 쌀을 들여놓고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 환갑의 나이에 아내와 함께 타국의 낯선 온천지에 와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온천장 옆 라젠스키 공원에 가을 석양이 물들기 시작하면서 갈색 단풍이 든 고목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빛의 명암도 선명해졌다. 나이 든 이들은 벤치에 앉거나 휠체어에 앉아서 이 고즈넉하고 느릿한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쓸쓸하기보다는 편안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체코의 경우도 60세 이상 노령인구 비율이 2050년에는 32.3%로 높아져 우리와 비슷하게 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될 것으로 예측하는데 이러한 작은 온천도시에 유락 시설보다는 요양병원과 복지시설들이 많이 눈에 띄는 것이 우리와 좀 달라 보였다.


이왕 온 김에 온천 약수를 담아가고자 수도꼭지 앞에 물통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이 약수는 미네랄워터로 심장병 등 노인질환에 좋다 하는데 심장병 환자였던 체코의 초대 대통령 마사리크도 이 물의 애용자였다고 한다. 물맛은 옛날 설악산 오색 약수터의 그것보다 철분 맛이 훨씬 강하게 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중장년 이상의 몇몇 사람들이 약수를 받아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여기서 요양하고 있는 듯싶은 노인네도 있어, 체코어로 인사말을 걸었는데 숫제 하지나 말 걸, 뭐라 화를 내는데 외국인인 우리를 혐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늙고 아프면 다 그러려니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 괴팍스러운 노인네는 타인에 대한 배려는 고사하고 순전히 자기만 생각하는 유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최근 고등학교 동창들 ‘단톡 방’에 들어가면 소위 ‘태극기 부대’ 친구들의 대단한 활약을 보게 된다. 물론 자신들 나름대로 판단한 시국이 답답해서 그러겠지만 말끝마다 핏대를 올리고 어떤 때는 욕설도 해대 질색이다. 나이가 들면 두 번째 아동기에 들어선다고 한다. 노인이 돼갈수록 이와 같은 도덕적 위험을 인지하고 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매사에 유머와 겸손함을 갖고 처신해야 할 것 같다.


포뎨브라디 성채
20141009_122131.jpg 마리안 탑
20141009_124813 Podebrady Collonade.jpg 온천장


20141009_162537.jpg 약수를 담아가는 수도
20141009_163349 스파 공원의 가을.jpg 온천장 옆 라젠스키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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