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모더니즘’과 실존주의

by 양문규

내가 학생들과 함께 읽는 소설들 대부분은 사회성이 강한 작품들이다. 물론 이를 좋아하는 학생도 있지만, 개중엔 개인적 실존의 문제를 다룬 소설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도 대놓고 문학의 현실비판 기능을 강조하다 보니 학생들이 그와 다른 경향의 작품들의 얘기를 꺼내기가 거북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로 시작되는 요절한 시인 기형도의 「빈 집」 같은 시를 지나가듯이 얘기만 해도 일부 학생들에게서 어떤 흥분 같은 것이 전해오는 걸 느낄 수 있다.


나는 역사의 발전 또는 진보를 얘기하고, 사회적,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을 강조하나, 아주 가끔은 인간은 결국 홀로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때가 없는 건 아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나와 동일한 존재는 없고, 나의 생애란 결코 두 번 다시 반복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


평양 출신으로 해방 이후 북한에 남은 최명익은, 박태원‧이상 등 ‘구인회’의 서울 모더니즘에 이은, 평양 모더니즘의 중심인물이다. 그는 우리 소설사에서 실존주의적 관심을 처음 드러낸 작가가 아닐까 싶다. 이 시기 서울에서 이상, 그리고 평양에서 최명익 같은 새로운 성향의 작가들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서구에서 모더니즘 또는 실존주의적 경향의 소설은 1차, 2차 세계대전 사이의 불안정성 속에서 출현했다.


체코로 안식년 갔을 때 만난 카프카가 그러한 대표적 작가 중 하나다. 카프카는 체코인들 사이에 살면서 독일어로 글을 썼던 유대인 작가로, 출신 자체부터가 뿌리 뽑힌 존재다. 프라하 예술인 국립묘지에 가면 당연히 카프카는 없고, 그는 유대인 묘지에 가서 쓸쓸히 묻혀있다. 그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내 ‘고향’인 프라하에서도 그렇게 쓸쓸하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지지만 나는 사랑할 수 없다. 나는 너무 멀리 왔고, 추방당했다.”


최명익의 「비오는 길」(1935)은, 평양을 무대로 카프카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침울한 성격의 사무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출퇴근길 마주치는 사람들과 거리의 풍경에서 진한 쓸쓸함과 고독감을 느낀다.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노방(路傍)의 타인’과도 같다. 인간 서로는 서로에게 낯선 존재로 살아가며 이 익명성 속에서 개개인의 고독은 깊어간다.


더욱이 세상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 주인공은, 오가다 만난 사진관집 주인의 가게에 어느 날 ‘사진’이 아니고 ‘셋집’이라 쓰인 백지가 붙은 걸 본다. 무력한 주인공에게 속물적인 충고를 마다 않고 지극히 생활적이던 주인이 장질부사로 느닷없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존재의 무의미함! 실존주의는 이를 ‘부조리’라 부르는데, 부조리란 자신과 세계가 존재하는 의미가 있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런 것 자체를 아예 발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실존의 고통은 이미 19세기 유럽의 낭만주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우리가 잘 아는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의 첫 곡인 ‘밤 인사’는 나는 “이방인으로 왔다가/이방인으로 떠나네.”로 슬프게 시작된다. 슈베르트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슬픔을 느낄 수도 없고, 누구도 다른 사람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상상하지만 사실은 스쳐 지나갈 뿐이다. 오, 이것을 깨달은 자는 얼마나 비참한가!”


사람들은 이런 작품들을 읽으면서 인간 존재가 겪게 되는 실존적 슬픔에 공감하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의 고독과 불안을 위로받으려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같이 그런 고독을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오늘의 이 주제는 참 버겁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냥 이 글에서는 우리 소설사에 최명익 같은 작가도 있었다는 점을 환기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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