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지음(知音), 허준의 「잔등」

by 양문규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분단이 시작된다. 초기의 지리적 분단은 그리 심각한 게 아니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대가 삼팔선을 잘못 알아 강릉까지 왔다가 양양으로 돌아간 일도 있다. 그러나 1946년 북한서 전면적 토지개혁이 실시되고 친일파가 숙청되면서 양 사회의 성격이 달라지며 사회적 분단 상태로 나간다. 1948년은 남북에 각각의 정부가 세워져 정치적 분단으로, 급기야 1950년 동족상쟁으로 남북은 돌이킬 수 없는 민족적 분단으로 간다.


해방 직후 발표된 몇몇 소설들은 분단으로 빚어질 비극적 사태를 어렴풋이 예감하는데, 이태준의 「해방 전후」(1946)도 그런 작품들 중 하나다. 허준의 「잔등」(1946)은 직접 분단 얘기를 한 것은 아니나,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닥쳐올 사태에 대한 착잡한 예감과 함께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작가 자신이 가졌던 바람은 무엇인지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허준은 식민지 시절에도 이미 몇 편의 소설을 발표했지만 이들은 사회성과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사회성은커녕 1930년대 당시 유행한 일본의 ‘신감각파’ 작가를 대표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설국」의 그 작가다!)를 흉내 낸 듯싶은, 삶의 허무함 속에서 미를 찾고자 하는 모호한 분위기의 소설을 썼다. 해방 직후 발표된 「잔등」 역시 다분히 그런 요소를 지니는데 문체도 난삽하고 만연체라 솔직히 학생들과 같이 읽자고 선뜻 권하고 싶은 작품은 아니다.


식민지 시절 중국 북만주 땅에 살았던 소설의 주인공은 해방이 되자 1945년 가을 무렵 친구와 함께 귀환을 하게 된다. 당시 북한 땅은 소련 군정 하에 있었고 이들이 통제하는 열차 편을 이용해 이동하면서 겪게 되는 여정이 주요 내용이 된다. 말이 열차로 이동하는 것이지, 당시 운송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던지, 서정주의 친구였던 ‘해바라기 시인’ 함형수는 서울로 오는 만원 열차의 기관차 지붕에 끼여 앉아 오다가 실족해 떨어져서 죽는 사고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고생 고생하며 만주서 조선 땅으로 넘어와, 강가서 고국의 한 소년과 마주치며 감동에 사로잡힌다. 조선의 맑고 정한 가을 햇볕의 산수에서 창살을 들고 장어를 잡는 소년의 행동의 강렬함에서 신선한 촉감과 함께 드디어 자신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음을 실감한다. 그러나 곧 다른 장소에서 만난 그 소년은, 좌익 지도자로 보이는 인민위원회 ‘김 선생’을 도와 재산도피를 하는 일본인들을 색출하는 작업에 앞장선 냉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해방의 감격과 함께 북한 땅에서 펼쳐질 이른바 엄정하나 살벌한 정치적 도정을 예감한다.


청진역서 함흥 가는 기차를 며칠 기다리게 된 주인공은, 역전의 한 할머니의 국밥집을 드나든다. 할머니의 아들은 일제 치하서 오랜 수감생활을 하다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옥사를 했지만, 할머니는 해방 후 쫓겨 가는 일본인 아녀자 난민에게 기꺼이 한 그릇 따듯한 국밥을 말아주고자 한다. 주인공은 그러한 할머니의 너그러운 슬픔에서 인간 희망의 넓고 아름다운 시야를 본다. 청진을 떠나는 기차에서 주인공은 국밥집의 희미한 등불을 바라보며, 잔등 아래서 인생의 깊은 인정을 누누이 이야기하던 할머니의 따뜻한 그림자를 그리면서, 웬일인지 모를 간절한 느꺼움이 자꾸 가슴 깊이 남으려 한다. 혁명 같은 사회적 풍랑 속에서도, 따뜻한 인간임을 잊고 싶어 하지 않았던 작가의 바람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허준은 「여승」 시로 잘 알려진 백석의 ‘절친’이다. 백석은 허준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다소 파격적인 시도 썼다. 백석은 시에서 허준을 “맑고 거룩한 눈물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자 시 속에서 허준은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라며 쓸쓸히 웃으면서 바둑판을 당기는데, 둘 다 비슷한 품성의 사람이었지 싶은 생각이 든다. 백석은 해방 후 북쪽에 남아 있었고, 허준은 남쪽에 있다가 북으로 갔는데 이후 종적이 묘연하다. 「잔등」의 내용으로 미뤄보건대, 그가 남쪽도 마찬가지지만 북쪽 체제를 견뎌내기란 대단히 힘들었을 것 같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평양 모더니즘’과 실존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