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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다마

@태백

by 무누라

우리 집 북쪽 너머 단지 밖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맑은 날에는 숨바꼭질이나 잡기 놀이 등을 하기에 좋았고 눈이 오면 눈싸움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공터 한쪽에는 낡고 녹슨 화물기차 몇 량이 버려져 있었다. 기차는 온통 녹이 슬었고 또한 까만 연탄 먼지를 뒤집고 쓰고 있었다. 커다란 것이 뻘거스름 하고 우중충하여 아이들이 놀만할까 싶겠냐만은 놀거리가 풍족하지 않았던 그 시절 촌동네에서는 그마저도 훌륭한 놀이터였다. 사실 다른 좋은 장소들 다 내버려 두고 공터에 가는 큰 이유가 있었다. 바로 '쇠다마'를 캐러 가기 위해서다.


버려진 기차는 많이 낡고 녹슬어서 쉽게 부서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게 중 많이 낡은 바퀴가 우리의 주된 공략 대상이었다. 주변에서 구한 돌멩이나 쇠막대기로 바퀴를 실컷 때렸다. '캉, 캉, 캉.' 두들기는 소리가 하늘로 퍼졌다. 버려진 기차에게는 심폐소생과 같은 생기를 돋우는 소리가 아니었을까? 잠시나마 그 옛날 갱도의 추억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르겠다. 실상은 철부지들이 제 몸을 깎아내리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바퀴의 바깥 부분이 깨지고 그 안에서 볼 베어링을 얻을 수 있다. 스트레스 해소는 덤이다. 본격적인 작업은 여기서부터다. 볼베어링은 안쪽에 작은 고리와 바깥쪽에 큰 고리가 있고 그 사이에 쇠다마들이 사슬 체인에 감싸인 채 자리 잡고 있다. 저 쇠다마들을 캐내기 위해 베어링을 마저 부셔야 한다. 낡고 녹슨 바퀴와 달리 베어링은 꾀나 튼튼하다. 바퀴 안에 있었을뿐더러 대체로 기름이 덕지덕지 묻어있어서 녹슬어 있지 않았다. 손으로 살살 굴리면 쇠다마들이 고리 안에서 빙글빙글 잘 돌았기 때문에 보기엔 빼내기도 쉬울 것 같았지만, 막상 쇠다마를 빼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이때부터는 연장이 필요하다. 공터 한편에 있는 창고를 샅샅이 뒤져서 망치, 드라이버, 송곳, 니퍼 등을 구해온다. 뒤지면 이런 것들이 나오는 곳에서 애들이 놀고 있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뭔지도 모르는 연장들을 대충 그 생김새로 용처를 어림잡아 마구잡이로 베어링을 쑤셔댔다.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였지만 남는 게 시간이었기에 열심히 하다 보면 결국 금쪽같은 쇠다마들을 캐낼 수 있었다. 이렇게 꺼낸 쇠다마는 대부분 녹 하나 없이 깨끗했고 심지어 번들번들 광택도 났다. 문구사에서 파는 다마들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씩 흠집 나고 찌그러져 있는데 베어링에서 꺼낸 쇠다마는 마치 이상적인 동그라미 같았다. 베어링 쇠다마는 당시 동네 다마치기 판에서 최상품으로 인정받았다. 다른 다마들은 한두 점이면 따는 반면 베이링 쇠다마는 열 점이나 스무 점 이상 쳐줬다. 장시간의 작업 끝에 최상급 쇠다마를 얻은 만큼 잃은 것도 있다. 손과 얼굴이 더러워졌고, 신발과 옷이 시커메졌다. 집에 가면 엄마한테 잔소리를 한 바가지 들어야 한다. 상관없다. 언제는 뒷일 생각하고 일 저질렀나.


인생은 참 아리송하다. 그 옛날 기차 바퀴에서 볼베어링을 꺼내 부수고 쇠다마를 캐던 촌놈이, 지금은 볼베어링을 비롯한 여러 기계요소를 공부하고 또 가르친다. 어린 시절 작은 고리, 큰 고리, 쇠다마, 사슬체인이라고 불렀던 것을 내륜, 외륜, 볼 전동체, 유지기라 다시 익혔다. 요소설계를 공부하다 어린 시절이 생각날게 뭐람. 의식의 흐름은 쥐도 새도 모르게 책과 공부에서 멀어져 옛 추억에 잠겼다가 그 시절을 그려보는 시 한 편에 머물렀다.




쇠다마


따귀를 후려치는 검은 분진에도

철마는 꿈을 품고 지하를 달린다.


울부짖는 핏덩이를 먹여 살리려

감기는 눈을 치켜세우고

가늘어지는 밤을 버텨왔나 보다.


소음 뒤엉킨 청춘의 황홀함을

먼발치에 내비두고

바퀴는 삐그덕 고개를 숙일지언정

다마만은, 다마 너만은 살리리다.


기름때 묻은 손을 마주 잡고

다마는 구른다.

녹슨 황혼의 철길을 따라

철마는 달린다.




요즘 재미 삼아 기계요소를 주제로 시를 하나씩 끄적이고 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사, 판과 판을 이어주는 리벳, 동력을 전달하는 축 등등. 딱딱하고 투박해 보이는 기계요소들이지만 그 안에 감성을 담아 보려 한다. 잘 모아 보면 재밌는 자투리 시집 하나 되지 않겠나 싶다. 괴랄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참으로 문학적인 공학도다운 모습 아니겠는가.






Pixabay로부터 입수된 StockSnap님의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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