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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 날아 다닌다

@태백

by 무누라

주황 노을빛이 제법 길게 늘어졌다. 허공에 가득했던 잠자리들이 서서히 지쳐 나뭇가지마다 내려앉고 하늘은 주황빛을 접어 붉게 타다 이내 어두워진다. 가을이구나.


아침이 밝았다. 아직은 잠자리 잡을 때가 아니다. 점심이 지날 때 까지는 다른 놀이를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한다. 미끄럼틀, 시소, 그네 슬쩍슬쩍 건들어보지만 다 재미없다. 해가 점점 높아가니 덥기만 하다. 집에 돌아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점심을 먹어치우고 거실 바닥에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온몸으로 무료함을 표출한다. 높이 솟은 저 해에다 실을 꿰어 얼레에 달아 돌돌돌 감아 내리고 싶다.


드디어 정수리의 해가 슬그머니 기울고 머리 위 공기가 살랑살랑 춤을 추기 시작한다. 장군이여, 무기를 챙기고 사냥을 시작하게나. 온갖 잠자리들이 하늘 가득 날아다닌다. 나에게도 마법 피리가 있어서 저 잠자리들을 자유자재로 불러 모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차차, 장군이여! 요행을 바라면 안 되오. 마법 피리보다 훌륭한 잠자리 채가 있지 않소. 잘 말라 누런 대나무 막대가 손에 착 감긴다. 촘촘한 그물망은 새털구름도 삼킬 요량으로 할랑 거린다.


어린아이 손가락 만한 된장잠자리는 가장 흔한 녀석이다. 대체로 잡았다 하면 된장이다. 간혹 꼬리가 빨간 고추잠자리도 보인다. 그보다 더 드물게는 날개 끝에 까만 띠를 가진 두점박이좀잠자리도 보인다. 얘네들은 나뭇가지에 잘 앉았기 때문에 잡기가 쉬웠다. 채를 잘못 휘둘러 놓쳤나 싶다가도 이내 근처 가지에 다시 앉기 때문에 잘 지켜보다가 낚아채듯이 잠자리채를 휘두르면 어렵지 않게 잡는다. 밀잠자리는 이들보다 더 커서 대략 어른 손가락 만하다. 암컷은 된장잠자리가 조금 커진 모습이라 그다지 주목할 게 없지만, 수컷은 온몸이 푸른빛이 도는 흰색이라 특이했다. 밀잠자리는 물가 근처에서 자주 발견되고 나뭇가지 위에 앉기보다는 평평한 바위나 나뭇잎 위에 자주 앉는다. 그래서 얘네들을 잡을 때는 낚아채면 안 되고 뒤덮어서 잡아야 한다. 눈치가 빠른 편이라 잡기가 쉽진 않다. 다른 잠자리들보다 월등히 큰 왕잠자리들은 보통 높은 상공을 날아다녀서 거의 잡을 수가 없다. 키가 좀 더 자라고 잠자리채도 더 길면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아파트 2, 3층 보다 더 높이 난다는 동네 형들 말에 금방 포기한다. 가끔가다 수풀 사이에서 전날 죽은 듯한 왕잠자리 시체를 발견할 때가 있다. 슬쩍 채집통에 넣어서 마치 잡은 양 행세를 한다. 날개가 새까맣고 온몸에서 반짝이는 푸른색이 나는 물잠자리는 개울가 근거리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쁘게 생겨서 인기가 많았지만, 다른 잠자리들과 달리 허약한 편이라서 채집통에 넣어두면 금방 죽어버렸다. 가끔 허공에 반짝거리는 빛을 따라가다 보면 실잠자리를 발견할 때도 있다. 이 녀석은 툭 건들기만 해도 죽어버려서 잡는 맛이 영 별로였다.


어느덧 해가 더 기울어 먼산 위에 걸려있고 하늘은 주황빛 노을에 황홀해진다. 점점 시야가 어두컴컴해서 저기 저 잠자리 꼬리가 된장인지 고추인지 아니면 밀인지 분간이 안 가고 그저 꺼먼 그림자처럼만 보인다. 어쩌면 잠자리들은 멀리 집으로 돌아가고 그림자들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네 그림자도 바닥에 축 늘어져 나보다 먼저 집으로 향해 가고 있다. 채집통 가득 들어선 잠자리들을 자리싸움을 하느라 푸드덕거린다.


"엄마~, 잠자리 이만큼 잡았다!"

"그래, 잘했네. 얼른 들어와 씻고 밥 먹어."


베란다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엄마에게 채집통을 번쩍 들어 자랑하고 얼른 집으로 들어간다. 나도 집에 돌아왔으니 이 녀석들도 보내줘야지. 방금 엄마가 계셨던 베란다로 가서 채집통 뚜껑을 연다. 아직 팔팔한 녀석들은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친다. 날개가 젖은 마냥 기운이 없는 녀석들은 베란다 앞 단풍나무 이파리 위에 우수수 떨어진다.


"엄마, 얘네들은 다 죽은 거야?"

"아냐~. 거기서 쉬다 보면 다시 기운 차리고 날아갈 거야."


잠자리들이 기운을 차리는지 밤새 지켜봐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씻고 밥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 보니 어느새 까맣게 잊고 만다. 다음날 아침에 번뜩 생각이 나서 얼른 베란다로 나가 단풍나무 위를 살펴본다. 그 많던 잠자리들이 하나도 안 보인다. '엄마 말이 맞나 보네.'


잠자리들아 이따가 또 보자.






사진: UnsplashJelena Senic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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