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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로 내려가는 길

@고한

by 무누라

고한에서 살았던 당시 우리 집은 5층짜리 아파트였다. 2동짜리 단지로 이루어진 이 아파트는 신기하게도 산 중턱에 있었다. 학교까지 가기에는 거리도 다소 멀고 험해서 단지에서 마련한 봉고차를 타고 다 같이 등교를 했다. 그러나 눈이 많이 내린 날에는 차량 운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걸어서 가야 했다.


단지 입구를 나오면 다소 가파른 경사가 있다. 밤 새 눈이 꾀 쌓여서 발이 푹푹 들어갔기 때문에 미끄럽지는 않았다. 다만, 무릎까지 눈이 덮이는 꼬맹이들은 걷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그 경사 바로 아래에는 허름한 집이 한채 있었다. 그 집에는 개 한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사실 그 집에서 산다기보다는 그곳을 기점으로 온 동네를 활보하는 똥개였다. 이 개는 사람을 워낙 좋아해서 대문의 파수꾼이 되기는커녕 야밤의 도둑놈에게도 친구 하자고 덤빌 녀석이었다. 한 때는 이 놈이 발정이 나서, 지나가는 사람만 있으면 붙잡고 발뒤꿈치에 거시기를 비벼댈 때가 있었다. 며칠을 그렇게 다니다가 결국 건넛마을 어느 집 늙은 개의 배를 불리고 나서야 멈췄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녀석도 휴업이다. 불러도 끼잉 끼잉 신음소리만 낼뿐 코 막고 잠만 잔다.


그 집에서 좌로 가면 쭈욱 도로가 나온다. 평소 봉고차는 이 길로 가지만, 걷기에는 많이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우측으로 빠진다. 그럼 바로 공터가 나온다. 탄광촌이라 그런지 까만 돌과 흙으로 덮인 공터였다. 신기한 건 여기서 어른들이 무나 배추 같은 채소를 키웠고 나름 잘 자랐다. 까만 바닥과 푸른 채소들의 대비가 인상적인 밭이었다. 여기까지 상당히 용을 쓰고 내려왔기 때문에 다들 땀이 삐질삐질 난 상태다. 물론 눈 왔다고 겹겹이 싸매고 나온 탓도 있다. 제 것인 마냥 무를 하나 뽑아서 흙을 턴다. 깨끗한 눈을 바르고 비벼서 남은 흙 자국을 지운다. 앞니를 높이 세우고 겉껍질을 갉아낸다. 새하얀 속살을 한 입 베어 문다. 여기까진 어른들이랑 같다. 어른들은 이러고 나서 '어흐~ 시원하다.'라고 하신다. 그러나 나는 시원하지 않다. 쓰고 맵다. 초겨울이 되도록 뽑지 않고 내버려 둔 이유가 이것인가. 안에 들은 무즙만 조금 쯥쯥 빨아먹고 이내 뱉어버린다. 머리채 같은 무청을 잡고 빙빙 돌리다가 휙 던져버린다. 괜한 화풀이다.


공터를 가로지르면 한 구석에 아래로 내려가는 샛길이 나온다. 말이 샛길이지 낮은 등산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거친 길이다. 거친 길에 눈까지 쌓여서 다들 매우 조심조심 내려간다. 동생들 손이라도 잡아주면서 내려가야 하지만 내 몸뚱이 하나이고 가기도 벅차서 이럴 때면 내리는 눈보다도 차가워진다.

"형아, 좀 도와줘."

"야 인마, 이런 길도 혼자 내려가야 너도 형아 되는 거야."

맑은 날 달음질이면 찰나에 갈 거리를 억겁의 시간이 걸려 내려오면 저만치서 학교 후문 쪽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고한의 국민학교도 태백에서와 마찬가지로 후문 일대가 아이들의 유흥터였다. 태백에서와 비슷비슷한 간식들과 오락기들이 널려있다. 오락 한판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오늘은 그냥 지나친다. 눈이 내린 날에는 더 재밌는 일이 운동장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 온 친구들이 먼저 설원의 축구를 하고 있다. 골대 옆에 가방은 내팽개치고 공을 찬다. 아직 눈이 쌓이고 밟히지 않는 곳에 공이 떨어지면 푹 박혀 버린다. 서로 공을 차지하려고 평소 흙바닥에서는 하지 않는 슬라이딩을 한다. 쌓인 눈 덕분에 몸을 날려도 아프지 않다. 아니다. 뭘 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기분이 솟구쳐져 있다. 골대 근처는 여러 아이들 밟고 다져 놔서 빙판 저리 가라다. 공은 가만있는데 서로 허공에 발길질을 하며 넘어진다. 웃음이 넘쳐난다. 어디에 맞았는지도 모를 공이 삘삘 골문 안으로 들어간다. 골 문안에 쌓인 눈 때문에 공이 멈춘다. 서로 골이니 아니니 하면서 우긴다. 그 사이 한 녀석이 냉큼 공을 반대편 골대 쪽으로 차 버린다. 언제 싸웠냐는 듯 다 같이 공을 향해 돌진한다. 설원 위 눈밭 축구로 시작하여 빙판 축구로 바뀔 때쯤 책임감 강한 누군가가 소리친다.

"야~! 이제 곧 조회 시간이야!"

책가방을 챙겨 들고 빠른 달음으로 교실에 들어간다. 아침 조회부터 기진맥진하고 옷도 많이 더러워졌다.


오늘 하루 어떻게 버티지? 어쨌든 등교 끝.






Pixabay로부터 입수된 James Kim님의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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