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누군가가 '시작'이라고 외친 적도 없다. 절기처럼 특정 시기에 정기적으로 하자는 약속도 아니다. 그저 매일 만나서 노는 아이들 사이에 오가는 말과 눈빛에서 자연스레 느껴지는 것이다. 묘한 신경전, 경쟁심 가득한 눈빛,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긴장감. 동네 꼬맹이들 모두가 알았다. 곧 딱지 전쟁이 시작된다 것을.
어른들의 월동 준비만큼이나 철저한 준비가 각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무래도 형제가 있는 집이 조금 더 유리하다. 그렇다고 외동이거나 누나, 여동생만 있는 애들이 항상 불리한 건 아니다. 걔들은 부모님이 도와주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전쟁에 어른들이 개입하다니, 반칙이다. 허나 심증은 있어도 물증은 없다. 상관없다. 열 배, 스무 배 더 준비하여 실력으로 넘어서면 된다.
좋은 재료 확보가 최우선이다. 딱지를 접기 위한 최적의 종이를 찾아야 한다.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신문지나 갱지는 안 된다. 종이가 너무 흐물거려서 딱지로 접어도 상대 딱지를 넘길만한 힘을 내지 못한다. 또한, 습기에 약하여 장기전에도 좋지 않다. 간혹 아주 얇게 딱지를 접어 오는 애들이 있다. 공격은 못할지언정 못 넘기게 하겠다는 작전이지만 고품질의 딱지를 지닌 고수 앞에서는 얄팍한 술수일 뿐이다. 얇은 딱지는 두께감 있는 비슷한 크기의 딱지로 정확히 맞추면 내리친 딱지에 착 달라붙어 한 몸이 되어 뒤집어진다. 간혹 짝수번 뒤집혀 원위치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언젠간 뒤집어진다. 만면에 그 얇은 딱지로는 조금이라도 무게감 있는 딱지를 죽어다 깨나도 못 뒤집는다. A4용지는 B급이다. 중하수 구간에서 얼추 몇 번 딱지는 칠 수 있다. 허나 고수 레벨에서는 버티는 힘도 넘기는 힘도 조금씩 부족하다. 사실 이러 저런 걸 떠나서 A4용지는 당시엔 구하기 힘든 비싼 종이였다. A4용지로 딱지를 만들어 나왔다간 멍청한 부르주아로 놀림만 받을 뿐이다. A급 딱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코팅지가 필요하다. 잡지책 표지나 질 좋은 월간 달력이 그런 종류이다. 빳빳하여 딱지로 만들었을 때 힘이 좋다. 또한, 코팅이 되어 있어서 내구성이 강해 장기전도 잘 버틴다. 박스 종이는 제외다. 딱지로 접기도 힘들뿐더러 대체로 지나치게 커서 껴주질 않는다.
S급 딱지는 종이로 결정되지 않는다. A급 딱지에 대한 무수한 담금질을 통해 S급 딱지가 탄생한다. 좋은 코팅지로 잘 만들어진 딱지를 사전이나 아령 같이 무거운 물건으로 하룻밤 정도 눌러줘서 최대한 납작하게 만든다. 이렇게 잘 눌린 A급 딱지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서 골목길 아스팔트 위에 잘 올려놓는다. 그리고 자동차가 지나가길 기다린다. 이때 일반 도로는 안된다. 위험하기도 하겠지만 대체로 차가 빨리 다녀서 딱지가 쉽사리 망가진다. 길이 험한 골목길도 안된다.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잘 만든 딱지를 베린다. 담금질 강도는 차가 천천히 지나가고 바닥이 고운 아스팔트 골목이 제일 낫다. 주의할 점이 하나 더 있다. 티코가 오는가 싶으면 재빨리 거둬야 한다. 차 무게가 가벼워서 눌림이 별로인 탓도 있겠지만, 왠지 모르게 티코가 밟으면 부정 탄다는 미신이 있었다.
차가 지나간다. 앞바퀴가 밟는다. 이어서 뒷바퀴가 밟는다. 얼른 가서 딱지 상태를 살펴본다. 잘못 놓아서 일부분만 눌린 딱지는 못쓴다. 사실 못쓸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초고수들의 싸움에서는 그 미세한 불균형이 승부를 가르곤 한다. A급은 필요 없다. 오직 S급만을 원할 뿐이다. 난 초고수가 될 거니까. 담금질 과정에서 망가지는 딱지가 생겨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급 딱지를 걸러낼 수 있음에 안도한다. 대략 대여섯 번의 담금질을 거친 딱지가 S급의 자격을 얻는다. 손으로 느껴본다. 마치 태초부터 딱지 형태로 존재한 한 몸체인 것 같다. 어떠한 힘이 가해져도 찢기거나 망가지지 않을 것 같다. 그 어떤 칼도 벨 수 없고, 그 어떤 총도 뚫을 수 없을 것 같다. 드디어 S급 딱지가 탄생한 것이다.
이제 딱지 전쟁에 참전을 선언한다.
우선은 주변의 아이들과 딱지치기를 한다. 아직 S급을 꺼낼 필요는 없다. 나의 날카로우면서도 힘 있는 딱지치기 기술이 있기에 A급 딱지로도 충분하다. 하나둘씩 가지고 있는 딱지를 잃어가고 나에게 딱지가 모인다. 십여 개 이상의 딱지가 모이면 전쟁의 범위를 확장한다. 다른 곳에 모여있는 전쟁터에 참전을 선언하고 딱지를 친다. 처음에는 부실한 딱지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본다. 적당히 견적이 나오면 쓸만한 A급 딱지를 가지고 하나씩 정복한다. 간혹 상대의 딱지 크기에 따라 다른 딱지를 낼 필요가 있다. 전투에 임하는 전략도 슬슬 중요한 단계가 된 것이다. 별다른 위기 없이 이번 전장에서도 승리를 가져온다. 당연한 순서다. 그저 더 큰 무대로 가기 위한 발판일 뿐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몇몇 놈들과 연합을 맺는다. 많은 수는 필요 없다. 딱지치기 실력이 괜찮으면서도 믿을만한 녀석으로 2~3명 정도면 적당하다.
단지 내 좀 떨어진 동으로 원정을 간다. 멀리서 그들이 우리를 탐색한다. 우리가 가진 딱지의 규모 그리고 우리의 기세를 보고 그들 중 적당한 수준의 무리가 다가온다. 긴 말은 필요 없다. 딱지치기에 돌입한다. 만만치 않은 상대다. 우리 팀이 딱지를 잃어간다. 더군다나 여긴 그들의 홈구장이다. 상황을 반전시켜야 한다. 나와 나의 S급 딱지가 출전할 차례다. 나와 나의 S급 딱지는 강하다. 흐름이 순식간에 우리 쪽으로 넘어온다. 어느 정도 승리를 챙겨 갈 때쯤 다시 뒤로 빠진다. 진정한 고수는 상대에게 흐름을 넘겨주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빠져 재충전의 시간을 보낼 줄 알아야 한다.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한 숨 고르기 일 뿐이다. 나의 동료들이 내 기세를 이어받아 활약한다. 대세는 이미 우리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마무리를 하러 다시 나선다. 나의 S급 딱지도 많이 해졌다. 마지막까지 힘을 내다오. '이야앗. 팍!' 적의 마지막 딱지가 허공에 뜬다.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공중에서 거듭 회전한다. 짝수번 돌면 나가리다. '탁' 임무를 다한 두 딱지가 내려온다. 상대 딱지의 뒷면이 드러난다. 전리품을 챙기기엔 주머니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느 틈에 한 친구가 박스를 구해왔다. 보물섬의 황금을 쓸어 담는 양 딱지들을 주워 담는다. 돌아오는 길에는 내일의 계획을 세운다. 다음 목표는 다른 아파트 단지 진출이다.
내일의 해가 밝았다. 등굣길에 전날 챙긴 딱지들을 숨겨놓은 곳을 살펴본다. 믿을 만한 친구네 집 통로 지하에 안전하게 보관되어있다. 오늘따라 수업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쉬는 시간에 다른 단지에 사는 친구를 만나 의기양양하게 선전포고를 한다.
"학교 마치고 너네 동네로 갈게."
하굣길에 먼저 집에 간 친구가 헐레벌떡 되돌아오는 게 보인다. 조짐이 좋지 않다. 친구가 소리친다.
"야, 큰일 났어. 빨리 가봐!"
전속력을 다해 뛰어간다. 말하지 않아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안다. 딱지가 있는 곳. 도착하여 현장을 보는 순간 맥이 빠지고 주저앉는다. 서러움에 눈물이 난다. 소리를 지른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분함을 감추지 못한다. 누군가 우리들의 딱지를 꺼내어 불에 태워 버렸다. A급들은 죄다 타버려 까맣게 재가 되었다. S급들은 코팅 덕에 형태는 유지했으나 너무도 많이 손상되었다. 무기를 잃은 장수는 더 이상 전쟁에 나갈 수 없다. 이대로 전진을 멈춰야 하다니, 분하고 분하다. 허나 누구를 탓하랴. 보안에 더 신경 쓰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다. 이제 와서 범인을 색출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우리의 부실함만이 더 드러날 뿐이다. 아쉽지만 집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오늘은 더 이상 밖에 나갈 수 없다.
다음날, 약속한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죄 값을 받는다. 하루 종일 놀림과 핀잔이 이어진다.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참아야 한다. 여기서 화를 내면 우스워진다. 조용히 인내하며 기다릴 뿐이다. 다음 전쟁의 기류가 다시 맴도는 그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