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과 같은 엘리베이터에 갇혔다가 빠져나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괜스레 겁에 질려 몸을 움츠러든다. 이내 깨금발을 슬쩍 든다. 조금이라도 가벼워진 듯한 행위를 통해 긴장되는 마음을 달래고자 한다. 승강(昇降)의 너른 문(門)이 열리자, 무국(霧國)이었다.
아파트 정문을 빠져나와 도로 옆 인도를 따라 걷는다. 오리(五里)가 무중(霧中) 하여 코앞밖에 보이질 않는다. 발가락의 감각이 눈보다 먼저 인도가 끊겼음을 알린다. 주유소 앞으로 이어진 것이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주유소를 출입하는 자동차가 없는지 살핀다. 백묵(白墨)이 분무(噴霧)된 듯한 상황에 자동차들도 다닐 엄두가 나질 않을 테지. 다시 눈보다는 발끝에 온 신경을 모아 앞으로 나아간다. 그 순간 약간의 윤곽이 보인다. 나보다는 작은 키, 몸보다 커 보이는 머리통, 좌우로 약간 찌르는 듯한 귀, 모든 것이 뭉개져서 잘 보이지 않는 윤곽임에도 드러나는 똘똘함.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내 감각은 확신하여 소리친다.
"야! 원준아~!"
"어? 목소리가 무누냐? 어디야? 하나도 안 보여."
발걸음을 빨리할수록 흐릿한 윤곽이 조금씩 진해진다. 그러다 갑자기 번쩍하며 원준이의 모습이 또렷이 보인다. 10걸음 이상 떨어져 있을 때는 서서히 진해지던 윤곽이 3걸음쯤 되자 갑자기 맑아진 듯 다가온다. 어깨동무하며 나란히 걷는다. 하얀 가루가 둥그스레 우리 둘을 둘러싼 듯하다.
얼마 못 가서 다른 윤곽이 보인다. 어그러져 흐릿한 윤곽인데도 딱딱해 보인다. 우리 둘보다 어깨도 벌어져 있고 몸짓도 크다. 뭉개진 뒷모습에서도 약간 앞으로 쏠린 듯 급한 걸음이 엿보인다. 동시에 소리친다.
"성찬이다!"
"어이~ 김성찬~ 기다려 같이 가자~"
급한 걸음이 뚝 멈춘다. 어깨동무가 추가된다. 당연히 가운데는 키가 작은 인준이다. 아까보단 하얀 가루가 더 커졌다.
우측의 도로에서 노오란 불빛 두 개가 나란히 왔다가 빠알간 불빛 두 개로 바뀌어 이내 무소(霧消) 한다. 자동차 바퀴가 내뿜는 무신호(霧信號)가 점점 많아지고 저만치 앞에 빨간 점 하나가 흐릿하게 보인다. 누구보다 재빠르고 똘똘한 인준이가 발걸음을 멈춘다. 그 바람에 양옆의 나와 성찬이는 몸이 휘청인다.
"야, 왜 그래? 넘어질 뻔했어.~"
"건널목, 빨간불이야."
손가락으로 문대버린 빨간 점을 하염없이 쳐다본다. 한참을 쳐다봐도 그대로다. 문대진 모습도 빨간색도. 너무 오랫동안 치켜뜨고 있어서 눈이 뻑뻑하여 깜빡 눈을 감았다. 눈 깜작할 새 문대진 빨간 점은 없고 그 아래 비슷하게 문대진 녹색 점이 나와 있었다. 성질 급한 성찬이가 가장 먼저 간다. 이어서 인준이도 걸음을 나선다. 눈 깜빡하느라 늦은 나는 황급히 따라가지만, 균형을 잃고 휘청이다 어깨동무 대열에서 떨어져 나간다. 가까스로 인준이의 손을 잡는다. 누구랄 것도 없이 키득거리며 건널목을 건넌다. 건너야 할 하얀 줄은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저 앞의 녹색 점은, 아니 녹색의 인간인 듯한 윤곽은 재촉하는 듯 깜빡거린다. 이렇게 음무(陰霧)가 난무(亂舞)하는 상황이면 조금 느긋해도 괜찮을 텐데, 저놈의 녹색 인간은 재촉이 일상이다. 안전 보행이 무산(霧散)되지 않도록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겨 끝에 다다른다.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보니 길쭉한 윤곽이 보인다. 눈앞이 흐릿해서 그런가, 길쭉한 게 곧지 못하고 구불구불하다. 길쭉한 머리와 다소 구분이 모호하게 이어지는 긴 목, 얄팍한 어깨를 따라 흘러내리는 몸과 흐느적거리며 들러붙어 있는 팔다리는 한눈에 봐도 민이다.
"야, 허민! 거기 서서 뭐 하냐? 학교 안 가?"
"저쪽에서 너희들 오는 것 같아서 기다렸지."
흐느적 허민은 어깨동무를 싫어해서 –어깨를 거는 나로서도 걸쳐놓을 껀떡지가 없어서 다행이지만- 우리는 어깨동무 대열을 풀고 실내화 주머니를 건들거리면서 걷는다.
신호등을 따라 건널목을 하나 더 건너면 바로 학교로 들어가는 골목이 보인다. 문구점 앞에는 오늘도 뽑기와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 북적거린다. 다만 다른 날들과 달리 그 아이들이 한데 뭉쳐진 덩어리로 둥그스레 말려 보인다. 몇 걸음 더 가자 공기가 상쾌해진다. 짙은 안개 틈에서도 양옆으로 서 있는 높다란 잣나무들은 맑은 산소를 열심히 분무(噴霧)하는가 보다. 잣나무길이 끝나고 시야가 탁 트이며 운동장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순간 희끄무레한 물체가 날라와 우리 앞에 떨어진다. 누구랄 것도 없이 발을 휘둘러 '뻥' 하고 차버린다.
"앗싸, 내가 찼다!"
"무슨 소리야! 내 발에 맞았는데?"
"야, 너희 둘 다 거짓말 마라. 맑은 날에도 똥 볼 차는 놈들이 차긴 뭘 찬다고 그래."
서로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한 녀석이 땀을 흘리며 다가온다.
"야, 무누! 공을 저쪽으로 차면 어떡해! 우리 공인데 뺏겼잖아."
"야, 김승찬. 쭝얼거릴 시간에 빨리 가서 뺏어오면 되지!"
맑으나 흐리나 일찌감치 교실에 들어가는 법이 없다. 저러다 시작종을 치면 헐레벌떡 교실로 들어가겠지. 공 차는 아이들이 점점 더 무집(霧集)한다. ‘그나저나, 안개가 걷힌 건가? 공이 왜 이렇게 잘 보여. 오늘은 내가 골 넣을 날인가보다.’ 아직 교실로 간 건 아니지만 얼추 등교한 것으로 퉁치자!
사진: Unsplash의Dimitar Donovs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