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한
늦가을이다. 친구들과 모래놀이를 하고 싶었다. 아파트 놀이터에는 모래놀이할 터가 없다. 딱딱하고 먼지만 날리는 흙바닥뿐이다. 그렇다고 멀리 학교 놀이터까지 갈 순 없다. 수확이 끝난 감자밭으로 갔다. 사실 학교 놀이터보다 훨씬 좋다. 부드러운 흙 사이에서 자갈과 돌멩이들을 캐고 놀기 좋았다. 누가 누가 더 큰 돌멩이를 캐는지 내기했다. 파다 보면 지렁이와 각종 벌레가 튀어나왔다. 굴러다니는 그릇에다 모아놓고 어떤 사악한 짓을 해야 재밌을지 궁리한다. 가장 중요한 건 황금보다 귀한 황금빛 감자를 캐는 것이다. 감자를 수확할 때 크기가 작고 모양이 이상하거나 캐는 도중 손상된 것들은 밭에 내버려 둔다. 그러면 산짐승들이 내려와서 주워 먹고 돌아간다고 한다. 비단 산짐승들만을 위한 행위는 아니다. 산짐승들이 민가까지 내려오지 않도록 하는 방지책도 된다. 사악한 꼬마 녀석들은 그런 깊은 뜻도 모르고 산짐승들의 일용할 양식을 갈취한다. 대부분 쥐 대가리만 한 작은 감자다. 어쩌다 제 주먹만 한 녀석을 캐기라도 하면 그 순간 대장이 된다. 신나게 땅을 파다 보니 대략 한 바구니 정도 모았다.
"야, 저 벌레들은 어떡하지?"
"이따가 불피울 때 구워볼까?"
"그럴까?"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벌레 담은 그릇도 챙긴다.
근처 도랑에 가서 감자를 씻는다. 그런 김에 더러워진 손과 얼굴을 씻는다. 물장난을 안 할 수 없다. 앞에 있는 녀석이 세수하려고 고개를 숙일 때 목덜미로 물을 뿌린다. 오고 가는 물보라가 점점 커진다. 사방으로 뿌려지는 잔 물방울에 햇빛이 비쳐 무지개가 생긴다. 온몸이 젖은 김에 멱을 감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감자들이 떠내려가고 있다. 첨벙첨벙 뛰어가서 얼른 주워 담는다. 발걸음을 옮겨 놀이터로 향한다. 놀이터에서 놀던 몇몇 녀석들이 합류한다. 놀이터를 돌아나가서 버려진 탄광 사무소로 간다. 문과 창문이 다 떨어지고 내부 집기들도 하나 없이 회색 콘크리트 건물만 덩그러니 있지만 우리가 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문과 창문으로 막혀 있었다면 좀 무서웠을 거다. 내부에 집기들이 쌓여있었다면 더럽고 냄새가 났을 거다. 벽들이 적당히 바람을 막아줘서 좋았다. 뚫린 창으로 시야가 틔어서 좋았다.
사무소 뒤쪽 산으로 간다. 누구는 불쏘시개가 되는 마른 풀들을 모은다. 누렇다고 다 마른 풀이 아니다. 손으로 끊었을 때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면 잘 마른 풀이다. 누구는 작은 나뭇가지를 모은다. 불쏘시개 위에 올릴 1차 장작이다. 싸리나무 가지 같은 게 좋다. 누구는 큰 장작을 모은다. 쓰러지고 부러진 나무들을 찾는다. 땅에 박혀있거나 낙엽 아래 누운 나무들은 대체로 젖어있어서 별로다. 허리가 끊겨서 꼬꾸라진 채 공중에서 말라 죽은 나무가 좋다. 나무 기둥이야 도끼나 톱이 없어서 잘라가진 못하고 적당히 부러지는 가지들만 톡톡 끊어다가 모은다. 몇 번 왔다 갔다가 하니 한가득 보였다. 뻥 뚫린 창밖으로 땅거미가 드리워진다.
바닥에 마른 풀들을 둥그렇게 모아놓는다. 그 위에 잔가지들을 원뿔 형태로 빙 둘러쌓는다. 다시 그 위에 나무 장작을 역시 더 큰 원뿔 형태로 빙 둘러쌓는다. 너무 빽빽하면 공기가 잘 통하지 않아 불이 잘 붙질 않는다. 반대로 너무 성기면 장작이 쉽사리 무너지고 불길이 오래가질 않는다. 구석에 쟁여놓은 성냥을 켜서 마른 풀에 불을 옮긴다. 순간 불길이 확 달아오른다. 가만히 지켜본다. 아직 잔가지들에 불이 충분히 옮겨지지 않았다. 마른 풀들을 긁어모아서 더 넣는다. 아직 부족하다. 더 이상의 마른 풀은 없다. 일동 엎드리고 입을 내밀어 바람을 분다. ‘후~’하고 불 때마다 불길이 살아 오른다. 입바람에 날리는 재와 작은 불씨가 머리와 등위에 떨어진다. ‘타닥, 타다닥!’ 바로, 이 소리다. 잔가지들이 발갛게 타고 일부 불씨는 장작에도 옮겨져서 경쾌한 소리를 낸다. 이제부터 모닥불은 저 혼자 신나게 탄다. 모닥불만큼이나 신이 난 꼬마들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얇은 나뭇가지 끝에 잡아 온 벌레들을 꿴다. 벌레들이 타면서 구수한 냄새가 난다. 그러나 심히 구불거리는 녀석들을 바라보자면 먹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극렬한 저항도 잠시다. 녀석은 이내 축 늘어지고 시커멓게 타버린다. 불길에 던져버리고 새로운 녀석을 꿴다. 그 옆에 어떤 아이는 나뭇가지에 벌레 여러 마리를 주렁주렁 꿰어 불에 지진다. ‘으~, 악마 같은 녀석.’
어느덧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일부는 숯이 되어 벌겋게 열을 뿜고 있다. 캐온 감자를 던져넣는다. 불판이나 석쇠를 올려 적당히 굽지 않는다. 알루미늄 포일 같은 걸로 감싸지도 않는다. 그냥 마구잡이로 던져 넣는다. 한쪽에선 깡통과 철사를 갖고 쥐불놀이 준비를 한다. 감자 구울 만큼을 제외한 숯들을 긁어모아 깡통에 담는다. 밖에 나가서 신나게 쥐불놀이한다. 매번 하는 쥐불놀이지만 할 때마다 신난다. 돌아와서 구운 감자를 찾는다. 대부분 겉이 새까맣게 타서 까만 조약돌 같다. 후후 불어가며 타버린 부분을 벗겨보니 먹을 만한 알맹이는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밖에 안 된다. 검댕이 묻어 거뭇거뭇한 노오란 감자를 입에 쏙 넣는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지만 기분만은 천국이다. 열심히 까먹다 보면 손이며 얼굴이 죄다 새까매진다. 어설프게 먹은 감자 덕에 배가 미칠 듯이 고파진다. 남은 불길에 다 같이 오줌을 눈다. 마지막까지 물줄기를 내뿜은 녀석이 대장이 된다.
"대장님, 이제 집에 갈 시간입니다."
"오냐, 수고했다. 모두 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