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시장의 추억

@고한

by 무누라 Aug 23. 2023

고한초등학교 정문을 나와 남쪽으로 가면 읍내를 따라 흐르는 개천이 있다. 당시 개천은 아주 특이했다. 바위며 자갈들이 죄다 붉은 빛을 띠었다. 정확히 말하면 흐리멍덩한 잿빛이었다. 물이 검거나 탁한 것도 아니었는데 유독 돌들의 빛깔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다 크고 나서야 이는 탄광의 갱내수가 개천에 유입되고, 갱내수에 함유된 중금속들이 산화하여 생긴 '옐로우 보이' 현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개천에서 용이 나와도 시원찮을 판에 중금속으로 오염되고 있었다니 참으로 씁쓸하다.


다리를 건너 개천을 넘어가면 시장이 있었다. 조막만 한 읍내에 시장은 꼬마들의 긴장감 넘치는 놀이터였다. 시장에서 아이들로 가장 북적이는 곳은 오락실이었다. 학교 앞 문방구의 짱겜뽀 게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어마무시한 게임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특히 격투기 대전 게임이나 비행 슈팅 게임은 많은 아이의 사랑을 받았지만, 실제 게임 플레이는 일부 고학년 형들 독차지였다. 그들은 체구에서 풍기는 완력도 어마무시 했으나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재력을 뽐냈다. 50원짜리 동전 한가득 들고 오면 누구라도 자리를 내줘야 했고, 자리에 앉은 부르주아는 차곡차곡 동전을 쌓은 후 어깨를 으쓱하며 'insert coin' 하였다. 힘없고 돈 없는 나는 매번 뒤에서 형들의 플레이를 구경했다. 그것만으로도 재밌었다. 게임이 시작되면 항상 나서서 아나운서가 되어 상황을 중계하는 녀석이 있었다. 그러면 또 다른 녀석은 나름 알은 채 하여 '방금 저 형이 무슨 무슨 기술을 썼어.'라며 해설했다. 그 후로 십여 년 뒤 텔레비전에서 게임을 중계하고 해설하는 방송이 생겨날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만 말이다. 실컷 게임을 구경하고 나면 이내 출출해진다. 오락실 밖에서 허기진 배를 유혹하는 비릿한 짠 내가 밀려 들어온다. 게임 한 판 하려고 아껴온 오십 원을 내고 오뎅 한 개를 베어 문다. 짭조름한 오뎅 국물을 컵으로 떠서 홀짝거린다. 입 안 가득 행복이요, 여기가 천국이다. 정신없이 먹고 나니 용돈 이백 원을 다 쓰고 말았다. 아직 더 배고픈데 어떡하지.


친구들을 모은다. 다들 오뎅 국물의 짠 내가 가시지 않아 입을 쩝쩝거린다. 아무 말 없이 시장 한쪽에 있는 부식 가게로 간다. 주인아줌마는 가게 안에서 무료한 듯 앉아서 파리채만 휘두르고 있다. 가게 밖 좌판으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우리는 쪼그려 앉은 자세로 살금살금 자판으로 접근한다. 그리곤 좌판 이곳저곳으로 흩어진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바로 그 순간 각자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에 있는 부식 거리를 낚아채고 가게에서 먼 곳으로 도망친다. 누구는 건어물을 집어서 북으로 튄다. 찰나에 나는 딱딱한 마른 명태가 아닌 반들반들한 쥐포이길 소원한다. 다른 녀석 손에 들린 것이 퍼리한 게 딱 봐도 시금치 따위의 못 먹는 것이다. 그 옆에 있던 사과나 하나 집어 들지 풀때기를 들고 갈게 뭐람. 나는 반대 방향으로 한참을 달렸다. 혹시 몰라서 구불구불한 시장의 구석구석을 재빠르게 돌았다. 주변을 살피고 한숨을 돌린 후 내 손에 들린 소시지 한 덩이를 확인한다. 오늘은 내가 대장이다. 약속한 장소에 모여서 훔친 음식을 나눠 먹는다.


배를 채운 도둑놈들은 새로운 범죄를 모색한다. 오늘 저녁 탄광 사무실에서 불 피울 때 갖고 놀 장난감을 구하기로 한다. 시장 문방구에 간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물건을 탐색한다. 불장난에는 폭죽이 최고다. 한 놈은 입구 근처 양동이에 꽂혀 있는 막대 폭죽 를 서성인다. 다른 녀석은 이미 콩알탄을 주머니에 몰래 쑤셔 넣고 있다. 나는 문방구 가장 구석에서 나비 모양 폭죽을 집어 슬쩍 속옷 안쪽에 숨긴다. 콩알탄 도둑은 먼저 문방구를 빠져나갔다. 나 역시 아무 일 없는 척 가게를 나온다. 그 순간.

    "너 옷 속에 그거 뭐니?"

주인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뒤도 안 보고 도망친다. 나비 폭죽이 속옷 안에서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까워도 할 수 없다. 친구들 핀잔들을 생각에 치가 떨린다. 저만치 앞에서 막대 폭죽을 손에 들고 뛰어가는 녀석이 보인다. 냉큼 달려가서 뒷덜미를 '탁' 친다. 겁에 질린 녀석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본다. 이내 나를 발견하고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내게 발길질한다.

    "나비 폭죽은?"

    "몰라, 도망치다 떨어트렸어."

녀석은 재차 내게 발길질한다.


손바닥만 한 시골에서 소식은 삽시간에 퍼진다.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께 죽도록 혼났다.


돌이켜보면 참 한심하다. 가게 주인장께도 죄송하기 그지없다. 마음 한편이 씁쓸하기도 하다. 그 당시 그곳에서는 그 짓거리 말고는 딱히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작은 동네에 변변한 놀이터도 거의 없었다. 있는 놀이 기구들은 죄다 녹슬고 어디 한, 두 군데 병들어 있었다. 거기서 놀다가는 나도 병들기 십상이었다. 산에서 나무해다가 불피우고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잿빛으로 물든 개천에서는 놀고 싶지 않다. 이런저런 나쁜 짓이 쌓이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고한읍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대도시 춘천으로 이사했다. 좀 더 깔끔한 보금자리와 약간은 더 풍족한 생활 환경에서 가족과 더 밀착하며 지냈다. 자연스레 시골에서 하던 나쁜 짓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그 당시 그 시골에서 나도 냇가의 돌멩이들처럼 물들고 있었을까. 그래도 즐거웠는데. 나는 이제 깨끗해졌을까?나의 내면 어딘가에 여전히 ‘옐로우 보이’ 현상이 착색되어 남아있진 않을까? 그 녀석들은 어디에서 뭐 하고 있을까? 고한읍 개천의 돌들은 아직도 잿빛으로 남아있을까?






사진: Unsplashrawkkim

매거진의 이전글 대원아파트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