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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모여 이글루 되어

@고한

by 무누라

간밤에 눈이 많이 내렸다. 엄마가 눈 왔으니 나가서 놀라며 깨우신다. 아무런 저항 없이 부스스한 눈으로 완전무장을 한다. 눈코입 빼곤 모두 가리고 밖에 나간다. 발목 위까지 잠길 정도로 많이 왔다. 그러고도 더 눈이 내리고 있다. 소복이 쌓인 눈을 바라보니 방금 빠져나온 이부자리 같다. 털썩 누워본다. 하늘에서 송이송이 눈꽃 송이 떨어진다. 새하얀 점들이 내려오더니 눈앞에서 주먹만 해 진다. 고개를 슬쩍 돌려본다. 눈 옆으로는 눈이 쌓여 보이질 않는다. 다시 허공을 바라본다. 입을 벌린다. 하나둘 들어올 땐 좋았는데 이내 너무 많이 들어온다. ‘캬악, 퉤!’ 일어서며 침을 뱉는다.


이제 제 할 일을 시작한다. 양손으로 눈을 끌어모아 주먹만 한 눈뭉치를 만든다. 꾸부정하니 고개를 숙이고 눈 뭉치를 굴린다. 얼마 굴리지 않아도 머리통 이상으로 커진다. 못나게 자란 부분을 쳐주고 다시 굴린다. 어느새 허리는 펴지고 눈 뭉치는 덩이가 되어 허리 높이만큼 커져 있다. 이제는 양손으로 밀어서 굴린다. 힘껏 굴려 놀이터 한쪽에 둔다. 다시 눈뭉치를 만들고 굴려 눈덩이를 만든다. 처음 만든 눈덩이 위에 두 번째 눈덩이를 올려 눈사람을 만든다. 형태야 눈사람이지 눈코입 따위는 생략한다. 다음 눈뭉치 또 굴려야 한다. 그새 아이들이 죄다 나와서 저마다 제각각의 눈덩이를 굴리고 있다. 눈덩이를 만드는 족족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내가 만든 눈사람 주변에 쌓아놓는다. 꾀나 많은 눈덩이를 만들었는데도 아파트 앞마당은 여전히 새하얗다. 눈 굴리는 우리를 약 올리듯 하늘은 더 거세게 눈을 뿌린다. 어른들이 눈, 삽과 빗자루를 가지고 눈을 치우신다.

"녀석들 덕분에 눈 치우기가 수월하구먼."

동네 할아버지가 헛헛헛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신다. 어른들에 의해 바닥이 드러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괜스레 아쉽다. 정신없이 눈을 굴렸나 보다. 꼬르륵 소리가 힘차게 울린다.


점심을 먹고 놀이터에 간다. 과장 조금 보태서 미끄럼틀만큼 거대한 눈더미가 만들어졌다. 눈더미 한 귀퉁이에서 똥개들 마냥 구멍을 파기 시작한다. 하나둘씩 점심을 먹고 온 아이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고 구멍을 파기 시작한다. 각자의 구멍이 눈더미 한가운데서 만난다. 서로의 손가락을 확인하면서 이산가족보다 더 반가운 환호를 지른다. 더욱 열심히 판다. 친구의 손이 보이고 팔이 보이다 금세 얼굴까지 보인다. 매일매일 하루에도 몇 번을 만나는 친구이지만 이 순간 만나는 친구는 뭔가 다르다. 그놈은 그놈인데 새로운 그 녀석 같다. 반가운 마음에 악수한다. 이제는 눈더미 안에서 더 크게 구멍을 판다. 꼬마들 네댓은 충분히 둘러앉을 정도가 되어 이글루를 완성한다. 이글루가 바람을 막아주고 아이들의 체온이 내부를 데워서 이글루 안에 온기가 돌았다. 누구는 자리를 잡고 누워버린다. 누구는 꾸부정히 일어서서 창문을 만들겠다고 벽을 판다. 뭔갈 더 하고 싶고 더 놀고 싶은데 기운이 하나도 없다. 눈 굴리고 구멍 파느라고 힘을 다 썼나 보다. 너도나도 일찌감치 집에 간다.

"야, 우리 내일 이글루에서 제대로 놀아보자."

"뭐 하지? 소꿉놀이할까?"

"야, 시시하게 소꿉놀이가 뭐냐. 총싸움 같은 전쟁놀이 하자."

"그래, 잘 가. 내일 보자."


다음 날 아침 엄마가 깨우기도 전에 일어나서 다시 무장한다. 서둘러 이글루를 향해 달려간다. 먼저 온 친구가 이글루 앞에서 멀뚱하니 서 있는다.

"야, 안 들어가고 뭐 해?"

녀석은 가만히 손가락으로 이글루 안을 가리킨다.

"이런, 제기랄 똥개 새끼들!!"

간밤에 똥개들이 머물다 갔나 보다. 여기저기 똥이 한가득하다. 짜증이 솟구친다. 어제까지도 풍만하던 이글루를 향한 애정이 내리는 눈만큼이나 차갑게 식는다.

"야, 밟아."

너도나도 이글루를 밟아 부순다. 똥개 새끼들 두고 보자. 가만 안 둬.






사진: UnsplashMatt Seym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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