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주

@고한

by 무누라

내 고향 고한읍에 대형 리조트가 들어선다는 소식이 들린다. 카지노, 숙박 시설, 물놀이장과 함께 스키장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탄광 산업의 몰락과 함께 쇠퇴해 가던 촌 동네가 관광 산업으로 다시금 활기를 띨 전망이란다. 그런데 그거 아시나. 고한읍 스키 문화의 시작은 그 옛날 우리라는 걸.




며칠 눈이 내렸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치우고 치웠지만 일부는 길바닥에 눌어붙어 단단해졌고 나머지는 그 위에 살포시 덮여있다. 더 이상의 눈싸움, 눈사람, 눈 집은 지겹다. 모두 맥가이버가 될 시간이다.


동네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나무 판때기와 막대기들을 모은다. 톱으로 판때기를 엉덩이가 덮고도 남을 정도로 잘라준다. 판때기 너비만큼 자른 막대기 2개를 아래에 11자로 대고 못을 박아 고정한다. 막대기 아래에 굵은 철사나 얇은 철판을 덧대어준다. 썰매의 날을 만들었다. 이어서 판때기 상단에 썰매 날과는 수직으로 막대기를 고정하여 손잡이를 만든다. 이는 썰매에 앉아 엉덩이 뒤 양손으로 잡을 수 있게 하여 주행 시 방향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는 운전대 역할을 한다. 쇠 줄로 거친 부분을 다듬는다. 바닥에 못으로 긁어 이름을 쓴다.


스키도 만든다. 우선 불을 피워야 한다. 재료가 한가득하고 기술자가 여럿이니 작은 모닥불쯤이야 순식간이다. 팔뚝만 한 PVC 파이프를 반으로 갈라 반 원통 두 개를 만든다. 피워 논 불 위에서 흔들흔들 돌려가며 데워주면 파이프가 살짝 흐물거리기 시작한다. 녹아내리기 전에 꺼내어 나무막대로 탕탕 쳐서 판판하게 펴준다. 제대로 펴질 때까지 대장장이 담금질하듯 심혈을 기울인다. 그다음 앞쪽을 달구어 구부려서 날을 세운다. 끝으로 양옆에 구멍을 뚫고 철사를 연결하여 신발에 고정할 수 있도록 한다. 기다란 나무작대기 두 개는 폴대로 쓴다. 준비는 끝났다.


바로 장비를 사용하진 않는다. 덮여있는 눈을 좀 걷어줘야 한다. 스키나 썰매를 타고 내려갈 때 쌓인 눈이 함께 말리면서 주행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다들 굴러다니는 비료 포대나 상자떼기를 가져다 깔고 앉는다.

"야, 일등부터 장비 선택하기다. 준비, 시작!"

쌓은 눈을 헤치고 가느라 속도가 다소 느리지만 첫 주행의 짜릿함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상쾌하다. 아파트 단지로 올라오는 경사로는 어느새 근사한 스키장이 된다. 가히 훗날, 이 고장에 들어설 대형 스키장의 할아버지 격이라 할 수 있다. 에헴.

"내가 일 등으로 도착~!"

"아니지! 잴 먼저 올라가는 사람이 임자야!"

요동치는 규칙에 항의할 시간이 없다. 빨리 올라가서 양질의 장비를 선점해야 한다. 먼저 간 순서대로 스키를 차지한다. 썰매보단 서서 타는 스키의 스릴이 한층 더하기 때문이다. 올라오다 미끄러진 나는 뒤늦게 썰매를 챙긴다. 다행히 내가 만든 썰매다. 누군가 나도 모르게 내 이름 옆에 글자를 추가했다. ‘바보’.

‘젠장, 당했다.’


스키면 어떻고 썰매면 어쩌랴. 스스로 만든 장비로 자연이 내려준 스키장을 질주하면 그곳이 천국이다. 손잡이를 잡고 이쪽저쪽 번갈아 힘을 주어 갈지자로 내려간다. 늦게 내려가는 스키 선수를 위협하여 넘어트린다. 이번엔 자세를 고쳐 잡고 뒤로 눕듯이 몸을 핀다. 속도가 붙는다. 앞서가던 썰매 선수 등을 친다. 함께 뒤엉켜 경사를 구른다. 눈 떠 보니 한참 아래다. 웃느라 정신이 없다. 저만치 아래에 차들이 보인다. 걱정할 필요 없다. 며칠 이어진 눈 때문에 올라오지 못하고 도롯가에 강제 주차된 차들이다. 아랫집 똥개와 눈이 마주쳤다. ‘야, 똥개 온다. 도망쳐!’ 저 녀석도 이글루에 똥을 갈겼을 거다. 놀아주고 싶지 않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시 돌아가고픈 순간이 언제냐고 하면, 바로 이때로 가고 싶다. 직접 스키, 썰매 만들어 함께 경사를 내려오던 그 느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천상의 짜릿함, 즐거움, 행복.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때 그 느낌.






사진: UnsplashAlexander Gilbert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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