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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멱감으며

@춘천

by 무누라

친구들 몇몇과 모여 계획을 세웠다. ㅇㅇ이네 집에 놀러 가기 위해서다. 그깟 일 가지고 계획을 세울 정도인가 싶지만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친구 대부분은 춘천시 석사동이었지만 ㅇㅇ이는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무슨무슨리에 살았다. 어떻게 해야 갈 수 있는지 자세히 설명을 들었다. 그쪽은 길 자체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강 어디서 어느 길로 빠져서 쭉 오기만 하면 돼’ 정도로 정리되었다. 하굣길에 그 친구 따라서 가면 되는 거 아닌가 하겠지만 아직 풀지 않은 사정이 더 있다. ㅇㅇ이는 아기 때 소아마비를 앓았고 그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한다. 불편한 다리로 먼 거리를 통학할 수 없었기에 ㅇㅇ이는 매일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타고 등하교했다. 어쩌다 ㅇㅇ이네 집에 놀러 갈 생각을 했는지는 또렷하진 않으나 기억의 저 깊숙한 곳까지 탈탈 털어보니 ‘옥수수’라는 낱말이 함께 생각난다. 아마도 ㅇㅇ이가 즈그 집에 맛있는 옥수수가 있다고 했고, 그거 얻어먹을 겸 놀러 가자 한 것 같다.

"다들 조심히 오거라!"

ㅇㅇ이는 아버지 오토바이 뒤에 타고 먼저 출발했다. 서너명의 친구들과 함께 알려준 길을 되뇌며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도블록 길은 사라지고 아스팔트 외길이 나타났다. 이내 검은 아스팔트 길은 울퉁불퉁한 회색빛 시멘트 길이 되었다. 주변에 논밭과 개울이 가득 찰 즈음, 발밑은 비포장 흙길로 변하였다. 낯선 길이었지만 함께라서 두렵지 않았다. 쉬지 않고 떠드는 주둥아리들이 축지법이라도 시전했나 보다.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다. 길가에 나와 있던 ㅇㅇ이와 같이 집에 들어갔다. 마루에는 벌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걷느라 혹은 떠드느라 허기진 우리는 ㅇㅇ이네 부모님께 인사하자마자 허겁지겁 옥수수를 먹어 치웠다. 그리고 신나게 놀았다. 할 것 없는 시골에서 몸 불편한 친구랑 뭘 하며 놀았을까. 그저 함께 있었고 뭐든 던지고 잡고 뜯을 게 널려 있기만 하면 잘 놀던 그때였다.


학교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ㅇㅇ이네 집을 나섰다. 다시 돌아가는 길은 왜 그렇게 길고 지루했을까? 가도 가도 흙바닥 길만 보였다. 다들 지쳐 있을 때쯤, 옆에서 함께 걷던 냇물이 놀기 딱 좋게 물웅덩이를 형성하며 내려가고 있었다. 누가 손짓이라도 하는 양 다들 말없이 웅덩이를 향해 갔다. 땀에 전 옷을 벗었다. 속옷도 벗을까 하다가 놔뒀다. 신나게 멱을 감았다. ㅇㅇ이네 집으로 향할 때의 상쾌함 그 이상으로 시원했다. 실컷 놀고 나와서 햇빛에 몸을 말렸다. 젖은 속옷을 대강 털어서 가방에 넣고 옷만 입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금세 흙길이 시멘트가 되고 아스팔트가 되었다. 좀 전의 시골스러운 세트는 누군가 후다닥 치워버리고 나름 도시화 된 1990년대 중반의 춘천시로 막이 옮겨졌다. 꿈이었을까?


그 후로 한참 뒤, 즉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고향 친구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ㅇㅇ이가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일찍 죽었데.’ ㅇㅇ아, 편히 쉬렴. 꿈 같은 그곳에서.






Manuela Adler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949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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