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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누라 Oct 23. 2023

넌 나를 귀찮게 해

끝 없는 질문의 향연

모든 일에 열정 가득하던 임용 첫해, A는 내게 문제 풀이를 질의하러 온 첫 학생이었다. 내게도 질문하러 오는 학생이 생기다니 진정 선생의 길로 가는 맛인가 싶었다. 어렵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 열과 성을 다해 알려주었다.

  “안녕하세요. 질문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시간 괜찮으신가요? 이번엔 이 부분이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A는 첫 방문 이후 수시로 찾아왔다. 계속된 방문에 지친 나는 사회생활에서 터득한 거절 비법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는 제가 바로 알려주는 것 보단, 학생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해보는 게 학업에 더 도움이 되겠습니다.”


패착이었다. 상대는 사회의 언어를 아직 잘 모르는 순진무구한 학생이었다. 며칠 후, A는 고민해봐도 모르겠다며 다시 찾아왔다. 더 이상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초짜는 어느새 충실한 과외 선생이 되어 있었다. 당시 A는 '교직 이수’ 과정을 밟고 있어, 조만간 있을 기계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문제 풀이를 도와줬다. 계속 보다 보니 이 시험의 윤곽이 보였고, A의 공부 방향이 다소 맞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 방향을 수정해주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찾아올 것 같아서 어느 날 시간을 들여 상담하게 되었다.


임용고시의 전공 부분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60%는 해당 전공 교과 수업을 성실히 들었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30%는 다소 심화한 문제이다. 해당 전공 교재를 토대로 몇 번 복습하고 기출문제를 풀어봐야 도전할 수 있다. 나머지 10%는 속된 말로 떨어뜨리기 위한 문제이다. 해당 전공에 저런 부분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매우 지엽적이고 암기를 기반한 문제들이었다. 대부분 학생은 무작정 이것저것 외우다 지치고 포기한다. 작년에 이 부분 나왔으니 다른 것 위주로 봐야지 했다가 뒤통수 맞기도 한다. A도 적절한 전략 없이 이것저것 깔짝대다 방도를 잃은 채 질의응답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이 10%를 정복하기 위한 전략적 학습이 필요해 보였다.


출제자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아무리 지엽적이라 하더라도 일정 영역을 벗어날 순 없다. 예를 들어 ‘기계’ 관련 전공이라면 ‘재료’와 관련한 사항이나 ‘부품 명칭’ 등의 영역에서 세부적인 부분을 발췌하게 된다. 이런 문제들은 물고기를 낚는 어부의 전략이 좋다. 어탐기로 물고기 떼를 찾고 최대한 그물을 넓게 펴서 잡아야 한다. 따라서 먼저 기출문제를 분석하여 10%의 지엽적인 문제들이 그동안 어느 영역에서 출제되었는지 찾고, 영역별 출제 빈도를 통해 우선순위를 정한다. 그러고는 우선순위대로 열심히 외워야 한다. 확실히 가늠할 수 있는 물고기 떼에 그물을 드리우는 것, 그리고 남은 시간은 60+30%에 대해 완벽하게 준비하는 것이다.


상담을 마치며 마지막 하고 싶은 말을 건넸다. 그 후로 한참 동안 A는 찾아오지 않았다.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이제부터는 스스로 힘으로 해보길 권합니다.”






몇 개월 후, A가 찾아왔다.

  “합격했습니다.”

  “축하합니다. 그래, 어디로 갑니까?”

  “인천으로 갑니다.”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그동안의 만남에서보다 그날의 하루 동안 그 학생의 가장 많은 표정을 보았다. 무지하게 기뻤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힘든 학위 과정에서 박사만 취득하면 세상이 열릴 것이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학위 취득 후 바로 고학력 미취업자가 되었다. 지극히 좁은 문, 그 문조차도 언제 열릴지 모른 채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우연이 다가온 기회와 주변의 도움으로 국책 연구소에 취업했을 땐 세상 다 가진 듯 기뻤었다. 그날의 세상은 온통 그 녀석의 것이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새 출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그래도 제가 좀 도움이 된 것 같은데, 뭐 없습니까? 농담이고, 본인 공부한 자료들 좀 제게 다 넘기고 가세요. 혹시 알아요. 교직 준비하는 누군가 또 찾아올지.”


몇 시간 뒤 A는 공부한 자료를 제본한 책 한 권을 건네고 학교를 떠났다.







  “안녕하세요. 저 A인데요. 혹시 절 기억하시나요?”


어느 한가한 오후였다. 카페에서 커피나 한잔할 요량으로 나가고 있었다. 달라진 차림새와 사회인으로서의 꾸밈에 다소 어색했으나 분명 A였다.

  “아니, 왜 여기 있어요? 그나저나 저 만나러 왔어요? 그럼, 같이 카페나 갑시다.”


이런저런 볼일이 있어서 학교를 방문했다는 A는 대뜸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저, 교사 그만두려고요.”


순간 열이 뻗쳤다. 그 난리를 쳐서 힘들게 들어가 놓고는 그만둔다고? 나날이 취업 걱정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늘어가는 와중에, 취업 성공의 복에 겨운 줄 모르고 그만둔다고? 아니, 안 돼. 난 선생이지. 침착하자. 일단 사정을 들어보자.


 A는 그간 힘들었던 사정을 한참 꺼내었다. 낯선 환경에 홀로 시작하는 생활, 본인을 힘들게 하는 학생들과 그보다 더 힘들게 하는 나이 많은 동료 선생, 어찌 보면 사회 초년생이 응당 겪게 되는 과정들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힘든 건 힘든 거다. 내가 처음 사회에 진출했을 때가 생각났다. 어제의 학생이 오늘은 같은 사회인이 되어 사회의 쓴맛을 말한다.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어느새 내 안의 분노는 가라앉았다.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마음을 다스렸던 방법을 전해주었다.


1. 힘들게 하는 것을 죄다 적는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다 보면 안갯속을 헤매기 십상이다. 적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지만, 적다 보면 얼추 정리는 된다. 그러고는 내버려 둬라. 당장 해결할 필요 없다. 생각보다 많은 문제의 답은 시간에 있더라.


2. 힘든 와중에도 내가 누리가 있고, 내게 보장되는 것들을 적어본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살다 보면 내가 당연히 누리는 것들에는 쉽게 무감각해지고, 나를 힘들게 하는 작은 것들에는 민감해진다.


3. 당장 저 힘든 것들을 안 보기 위해 결단을 한다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지 적어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잃게 되는 것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 딱 잘라 결정하기 힘들다. 말했잖은가, 생각보다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 많다.


4.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생각해보자. 운동을 하거나 여행을 떠나는 것. 누군가를 만나는 것. 책을 읽는 것.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건, ‘나’에게 집중하여 ‘나’를 더 알아가고 ‘나’를 더 사랑하는 것.


  “생각보다 오래 얘기했네요. 볼일은 다 마친 거죠?”

  “네, 이제 가보겠습니다.”


이젠 안 오겠지?

재학생 때부터 졸업해서까지 귀찮게 하는 학생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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