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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

Screw

by 무누라

나는 그저 나약한 나사일 뿐이다

상아탑을 뚫어낼 수 있을까

강단의 저 외침이 나를 돌리고

다산(茶山)의 흑과 백이 어지러이 흩어진다

담헌(湛軒)에서 내 연장은 헛발질을 반복하고

오가는 말과 감정속에 내 남은 의식 마져 돌아버린다

질펀한 하룻밤 술자리에 풀어지기를 기대하지만

방구석 제자리에 아우내 하늘만이 돌고 돈다

무수히 돌아가며 제자리 같았던 일상이

어느덧 저만치 몇 걸음 나아왔더라

뒤로 갈 수없는 묵직한 전진

보폭은 미비할지라도 나에겐 자동풀림은 없으니

150장의 담금질을 뚫고 나와

나사는 더욱 강인해지리라

수만장의 저 세상 벽에 나는 박히리라

나사야 잊지말아라

작디작은 너를 위해서 유구한 역학의 역사가 함께 있었음을

이제 너에게는 너의 뜻을 설계할 힘이 있음을






[óbiter díctum]

구불구불, 빙글빙글. 돌고 도는 나선형의 나사산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면 그저 제자리에 맴돌고만 있는 것 같다. 조금만 시선을 멀찌감치 놓고 보면 어느새 조금 전진해 있다. 때론 그렇게 먼 길을 돌고 돌아가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가벼운 탄력을 받아 신나게 돌다 보면 상당히 깊은 곳까지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 어느 순간 회전이 급격히 더뎌진다. 전진은 고사하고 오히려 뒤로 튕겨 나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진다. 온몸이 옥좨 온다. 숨이 막히고 갈비뼈가 바스러질 것 같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시야가 아득해진다. 순간 무수한 함성이 귓가에서 울린다. 나의 성장과 함께한 모든 이들의 소리 없는 응원이 울린다. 손끝부터 조금씩 힘을 준다. 손가락 마디를 구부리고 주먹을 쥔 뒤, 두 팔을 몸에 바싹 붙여 웅크린다. 하나, 둘, 셋! 한 번 더 하나, 둘, 셋! ‘빠지직’ 저 멀리에서 그들이 패배한 소리가 들린다. 마지막으로 하나, 둘, 셋! 상아탑을 뚫고 나간 세상 저편에서 더 두텁고 무시무시한 삶의 장벽들을 마주하며 이내 까마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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