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모래판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다.
씨름의 대중적인 인기 확산을 등에 업고 1983년에 새로 창설된 천하장사 대회는 대회 기간 내내 장충체육관을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팬들로 메워지게 하였다. 천하장사 대회의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로 점쳐진 장사는 역시 당시 모래판의 양대산맥이자 동갑내기 라이벌 홍현욱과 이준희였다. 천하장사 대회를 이틀 앞두고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당연히 천하장사를 놓고 홍현욱과 이준희가 맞대결을 펼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으며 두 명의 장사를 집중 조명하였다.
하지만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이다. 그래서 재미있다. 모든 이의 예상대로 홍현욱과 이준희가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결승에서 맞붙었다면 과연 씨름이 80년대 최고의 인기 실내 스포츠로 각광을 받을 수 있을지 자문해보게 된다.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가 펼쳐진 1983년 4월 17일 장충체육관은 팬들로 가득 메워졌다.
그러나 대회 초반부터 이변이 일어났다. 당연히 결승에 오를 것으로 예상되었던 홍현욱이 신예 장용철에게 패하면서 8강 문턱에도 들지 못한 것이다. 모래판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결국 결승을 문턱에 앞둔 4강에는 또 다른 강자 이준희, 출전 선수 중 제일 최단신(172cm)이지만 빠른 스피드와 화려한 기술을 자랑하는 최욱진, 예선에서 '독전갈' 홍현욱을 무너뜨리는 이변을 연출한 신예 장용철, 마지막으로 경남대 2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 장사 이만기 등이 올라갔다.
4강 진출자 중 이준희와 장용철은 가장 무거운 체급인 백두급, 이만기와 최욱진은 한라급에 속하였다. 서로 몸을 맞부딪히고 진행하는 씨름의 성격상 당연히 백두급 장사들의 우위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이만기 외 최욱진은 체격의 한계를 뛰어난 기술과 스피드로 극복하고 결승에 진출하는 이변을 일으킨다. 그중에서도 이만기의 결승 진출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대이변이었다. 준결승에서 당시 홍현욱과 더불어 최강자의 지위를 누리던 이준희를 2-1로 격파하는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이다. 21세 대학생의 반란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회 천하장사 대회 결승전은 역대 천하장사 결승전 중에서 가장 다이내믹했고 씨름의 모든 묘미를 한껏 담아놓은 결정판이었다. 당시에는 태백급, 금강급, 한라급, 백두급의 4 체급으로 분류되었는데, 한라급은 힘과 기술씨름의 모든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이른바 '골든존'이었다.
이만기와 최욱진의 결승전에는 씨름의 기존 패러다임을 뒤집어 놓는 치열한 명승부였다. 안다리, 잡치기, 밭다리, 호미걸이 등 각종 현란한 기술들이 전광석화처럼 구사되면서 씨름의 동적인 쾌감을 극대화시켰다. 만약에 모든 이들의 예상대로 이준희와 홍현욱이 결승에 올랐다면 이와 같은 다이내믹한 승부는 재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씨름의 다이내믹함은 일본의 국기 스모와는 차별화된 새로운 묘미였다. 한없이 정적인 스모보다 훨씬 다채롭고 박력 있는 스포츠인 씨름의 경쟁력을 전 국민에게 각인시켜준 최고의 명승부였던 것이다.
2-2로 팽팽한 대결이 펼쳐지던 마지막판에서 이만기는 호미걸이를 구사하며 최욱진을 쓰러뜨린다. 순간 이만기는 뜨거운 포효로 대한민국 씨름에 혁명을 선포하였고, 장충체육관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놀라운 승부에 뜨거운 환호로 승자 이만기와 패자 최욱진에게 성원을 보낸다.
1회 대회의 그림 같은 명승부는 씨름의 인기를 급상승시키는데 공헌하였고, 21세의 대학생 이만기는 일약 전 국민 스타로 부상하게 된다. 국민스타이자 대한민국 천하장사 이만기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1회 천하장사 대회 최종 순위 - 천하장사 이만기(경남대), 1품 최욱진(경상대), 2품 이준희(부산 공동어시장), 3품 장용철(단국대), 4품 조태호(부산 공동어시장), 5품 손상주(영남대), 6품 유기성(현대중공업), 7품 신영태(현대중공업)
이만기의 힘과 기술의 우수성을 확실하게 입증시킨 대회는 다름 아닌 그 해 10월에 열린 2회 천하장사 대회에서였다. 1회 대회에서 우승할 당시만 하더라도 일부에서는 '갑자기 급조된 대회라 기존의 강호들이 미처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만기의 대진운이 좋은 편이었다' 등으로 이만기의 우승을 폄하시키려는 여론도 조성되고 있었다. 기존의 이준희, 홍현욱 등 강호들의 저력이 2회 대회에서는 본격적으로 다시 발휘될 것이라는 예측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이만기는 이러한 여론을 실력으로 일거에 잠재우며 일축시켰다. 2회 대회에서 이만기는 8강에서 이준희와 맞붙게 된다. 다른 조에선 홍현욱이 1회 대회 준우승자인 최욱진을 가볍게 메다꽂으면서 돌풍을 잠재웠던 터라 과연 또 다른 강호 이준희도 이만기의 돌풍을 잠재울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첫 판을 이준희가 먼저 따내자 역시 기존 강호들이 다시 분발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무렵, 이만기는 화려한 기술과 힘을 앞세워 이준희를 내리 두 번 연속 모래판에 메다꽂는다.
2회 대회 결승전은 '떠오르는 장사' 이만기와 '기존의 강호' 홍현욱의 진검승부가 펼쳐졌다. 1회 대회에서 8강에도 들지 못해 절치부심한 홍현욱은 70년대~80년대 초반의 최강의 위용을 되찾기 위해 별러왔고 디펜딩 챔피언 이만기는 자신의 우승이 결코 거품이 아니었단 걸 입증시켜야만 했다. 먼저 이만기가 두 판을 따내고 홍현욱이 한판을 만회하여 2-1, 네 번째 판에서 '독전갈' 홍현욱은 주특기인 변칙공격을 걸기 위해 이만기의 다리샅바 잡은 손을 밀쳐내고 변칙공격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이만기는 강력한 하체의 힘을 이용 홍현욱의 허리샅바를 움켜쥐고 한 바퀴를 돌리더니 반 뒤집기로 모래판에 홍현욱을 메다꽂는다. 홍현욱의 중심을 역이용해서 제풀에 쓰러지게 만든 기가 막힌 공격이었던 것이다. '독전갈' 홍현욱의 주특기마저 역이용하여 재낀 이만기는 장충체육관이 떠나갈 듯 히 함성을 지르고 포효한다. 진정한 '이만기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포효였다. 장충체육관 개장이래 사상 최다 유료 관중인 7천1백여 명이 입장한 2회 천하장사 대회 결승전은 이만기의 시대를 확실하게 열어젖히는 시발점이 되었다.
2회 천하장사 대회 최종 순위 : 천하장사 이만기(경남대), 1품 홍현욱(현대중공업), 2품 조태호(부산 공동어시장), 3품 최상일(서울 일반), 4품 이준희(부산 공동어시장), 5품 최욱진(경상대), 6품 윤상일(경남대), 7품 손상주(영남대)
이만기의 천하장사 등극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니었다. 1회 대회 우승에 안주하지 않고 거구들과 대적하기 위해 체중을 93kg에서 98kg으로 늘리고 여름 훈련 기간 동안 황경수 감독의 지도하에 매일 50명의 장사들과 5판 3 승제 승부를 갖는 초인적인 훈련을 소화했기에 가능했다. 1,2회 연속 천하장사에 등극하며 이만기는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게 된다. 우승을 통해 상금 4천3백만 원을 벌어들이며 일약 고액 연봉 스타 못지않은 부를 얻게 되고 여기에 웬만한 탤런트 뺨치는 준수한 외모에 모래판에서 다양한 표정으로 포효하면서 어필하는 모습은 그의 상품가치를 단번에 올려놓게 된다.
폭발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그 해 이만기는 대우전자와 광고 계약을 맺으면서 무려 3천만 원을 받게 된다. 여기에 승용차까지 제공되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당시 동시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던 야구의 장효조가 1년에 2천만 원의 계약금을 받고 삼성 TV, VTR 광고에 출연했고, 축구의 허정무가 4개월 계약에 1천5백만 원, 야구의 백인천, 김재박 등이 1천만 원을 받은 것을 감안하면 당시 이만기의 대중적 인기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혹독한 훈련과 끊임없는 자기 계발을 통해 씨름판에 혁명을 일으킨 천하장사 이만기의 등장은 1983년 스포츠에 최고의 센세이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