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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세 Jan 13. 2021

추억의 씨름(1) - 1983년 이전 판세는?

지각변동의 서막이 서서히 달아오르다.

유년기, 청년기를 거치는 당시 씨름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특히 KBS 1 TV에서 5시 30분부터 천하장사 대회를 생중계해주는 날이면 왠지 모를 가슴 벅차오르는 기대감과 설렘으로 들뜬 적도 있었다. 천하장사 대회는 체급별 장사씨름 대회를 우선 실시하고 (보통 금요일 - 금강급, 토요일 - 한라급, 일요일 - 백두급) 월요일에 실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규황 캐스터의 구수한 음성과 오경의 해설위원의 맛깔스러운 해설이 보는 재미를 더욱 돋웠다.


1980년대 씨름은 국내 실내 스포츠 중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였다. 천하장사 씨름대회가 개최되는 날이면 장충체육관은 구름관중들로 몰려들었다. 80년대 씨름의 인기몰이의 주역은 다름 아닌 1983년 4월 17일 대한민국 초대 천하장사에 등극한 이만기였다. 당시 21세의 대학생 이만기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무명에 가까운 선수였다. 그의 천하장사 등극은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는 '씨름계의 쿠데타'로 표현될 정도였으니 그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만하다.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100kg의 거구들을 모래판에 메다꽂는 그의 기술씨름은 씨름의 재미를 배가시켰다. 그리고 준수한 그의 외모는 여성팬들의 관심까지 불러일으켰다. 당시 국민가수 조용필을 능가할 정도의 폭발적인 인기였다. 당시 야구에 최동원, 농구에는 이충희가 있었다면 씨름에는 이만기가 있었다. 



또한 이만기 외에도 당시 씨름판에는 다양한 캐릭터를 지닌 선수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인간 기중기' 이봉걸, '뒤집기의 달인' 이승삼, '밭다리의 달인' 고경철, '오뚝이' 손상주 등 각기 자신의 뚜렷한 장점을 내세워 개성 있는 씨름을 구사한 선수들이 있었기에 씨름의 흥미는 더욱 배가될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접어들면서 씨름의 인기는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90년대 중반 이후 기술보다는 힘에 의존한 씨름을 구사하는 선수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등장하면서 경기의 묘미가 반감되었다. 또한 씨름 협회의 행정 부재, 내분은 씨름의 인기 몰락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결국 모래판에 서 있어야 할 최홍만, 이태현, 김영현 같은 간판스타들이 남의 나라의 링에 서서 돈벌이에 나서는 서글픈 현실이 일어나고 말았다. 


필자의 기억에 남아있는 씨름은 80년대와 90년대의 황금기 시절인데, 그 당시 씨름의 콘텐츠는 풍성하였고, 다양한 스토리들이 탄생하였다. 오늘부터 필자의 기억에 남아있는 씨름에 대한 단상을 올려보고자 한다. 오늘은 1983년 천하장사 씨름대회가 개최되기 직전의 씨름판 판세를 되짚어본다.


이만기 이전의 씨름판은 과연 어떤 선수들이 지배했을까? 필자도 유년시절에 처음으로 접한 선수는 이만기 장사였다. 그 이전의 선수들은 그저 아버지 세대의 어른 분들이 이야기해주는 귀동냥으로만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 세대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었던 씨름선수는 다름 아닌 김성률 장사였다. 김성률 장사가 경기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만기가 나오기 이전에 씨름하면 김성률이었고, 기량이 워낙 출중해 대중적인 인기도 많이 모았었다고 한다.


우선 김성률 장사의 공식적인 프로필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1948년 3월 4일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성호초등학교마산중학교, 마산상업고등학교(지금의 용마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유도와 씨름, 레슬링에서 전국대회를 석권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중학교 재학 중에는 축구를 하였으나 고등학교 때 다시 씨름부에 들어가 전국 체육대회 씨름 부분에서 2연패를 이루는 데 기여하였다. 

1972년 경남대학교 상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학을 전공하였다. 1970∼1976년 대통령기 전국장사씨름대회에 출전하여 7연패를 거두었고 1971년 제25회 전국씨름선수권대회 일반부 우승, 제7회 전국장사씨름대회 겸 제14회 전국 종별 씨름선수권대회 3연패, 1972∼1976년 KBS배 전국장사씨름대회 5연패를 이루었다.


그 뒤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 이만기·강호동·이승삼 등 수많은 씨름 스타들을 배출하였다. 1983년 경남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 부교수로 임용되었으며 2004년 5월까지 동대학 체육교육과 교수로 활동하였다. 2003년 9월에는 대한씨름협회 기술분과위원장을 맡아 생활체육으로서의 씨름 보급을 위해 힘을 쏟았다.


1972년 경상남도 문화상, 1999년 마산시 문화상을 받았으며 1999년 ‘20세기 국내 스포츠 스타 100인’에 선정되었다. 2004년 5월 15일 스승의 날에는 교육인적자원부 총리 표창을 받았다. 2004년 5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출처] 김성률 [金成律 ] | 네이버 백과사전


1970년부터 1976년까지 개최된 각종 굵직한 장사씨름대회를 석권한 70년대 씨름의 최강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은퇴 이후에는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 이만기, 이승삼, 강호동 등을 배출하고 생활체육 씨름 보급에도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은 대한민국 씨름의 산증인인 것이다.


183cm의 키에 120kg의 거구인 그는 발기술이 장기였는데 씨름을 시작하기 전에는 초등학교 때는 유도, 중학교 시절에는 장학생이 될 정도로 축구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인 바 있다. 유도와 축구에서 경험한 발기술을 씨름에 응용한 그는 당대 최고의 장사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워낙 힘이 장사인지라 전국체전 때마다 마산 대표로 출전하여 유도, 레슬링, 투원반 등 힘을 바탕으로 하는 다양한 종목에서 입상을 하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19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던 김성률 장사의 독주시대는 1975년 당시 약관 18세의 고교생에 의해 종식되었다. 그 장본인은 홍현욱 장사. 18세의 홍현욱은 1975년 10월 26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전국 장사씨름대회 결승전에서 29세의 최강자 김성률 장사를 들배지기로 내리 메다꽂아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된다. 홍현욱의 장기는 배지기 외에도 샅바를 놓은 상태에서 잔기술에 능해 '독전갈'이라는 애칭을 얻기도 하였다.


그 대회를 기점으로 홍현욱은 모래판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게 되고 어느덧 나이 30을 바라보는 김성률은 서서히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홍현욱과 더불어 모래판의 세대교체를 주도한 새로운 강자가 탄생하였다. '모래판의 신사'로 잘 알려진 이준희 장사가 등장한 것이다. 1976년 종별선수권 대회에서 김성률 장사를 누르고 패권을 차지한 이후 78,79년 회장기 장사 타이틀을 3회 연속 석권, 79년 대통령기 장사씨름 대회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그 해 최우수선수로 선정된다.



김성률 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 모래판은 홍현욱과 이준희라는 동갑내기 라이벌이 양분하게 된다. 183cm 125kg의 홍현욱 장사와 187cm 115kg의 이준희 장사는 매번 막상막하의 접전을 펼치면서 팽팽한 경쟁구도를 유지해왔다. 1983년 이전까지의 모래판의 판도는 1970년대 중반까지 김성률 장사의 독주시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홍현욱 장사와 이준희 장사의 라이벌 시대로 요약될 수 있다. 

씨름의 인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개최된 1983년 4월의 천하장사 대회가 개최될 당시만 하더라도 당시 모래판을 양분한 홍현욱과 이준희 장사의 맞대결로 판가름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이다. 1983년 4월 장충체육관에서 대한민국 씨름에 쿠데타가 일어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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