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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세 Jan 21. 2021

추억의 씨름(3) - 샅바싸움도 씨름의 일부?

이변이 일어난 1984년 제3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1983년 2번의 천하장사 대회를 개최하면서 폭발적인 흥행에 고무된 대한씨름협회는 1984년부터 천하장사 대회를 기존의 두 번에서 3월, 6월, 9월에 걸쳐 세 번 개최하는 것으로 변경한다. 1984년 첫 천하장사 대회를 앞두고 과연 이만기의 천하장사 3연패가 가능한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하지만 기존의 강호 이준희와 홍현욱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홍현욱은 1984년 1월 설날 천하장사 대회에서 이만기를 눕히고 장사에 오르는 등 기량이 급상승세에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이준희 또한 꾸준한 성적을 내면서 언제든지 천하장사를 넘볼 수 있는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만기의 정상 수성이냐, 기존 강호들의 자존심 회복이냐 1984년 벽두부터 모래판은 뜨겁게 달구어졌다.


1984년 3월 8일 장충체육관의 모래판에는 잇따른 이변이 일어나게 된다. 우선 천하장사 3연패를 노리던 이만기는 자신의 '천적' 김광식(25세, 현대중공업)에게 불의의 어깨걸어치기 공격에 역습을 당하면서 예선 탈락하는 이변이 벌어진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만기와 김광식은 전형적인 '호루라기 씨름'을 구사하는 스타일인데, 심판이 판을 시작하는 호루라기를 울리자마자 전광석화 같은 기술 공격으로 판을 결정짓는 스타일이란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의 씨름을 구사하는 이만기가 그래서 김광식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으며, 김광식은 스피드를 이용한 역습으로 이변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또 다른 강호 홍현욱 역시 예선에서 인하대의 장지영에게 2-1로 역전패를 당하면서 탈락하고 만다. 22세의 나이, 182cm 100kg의 체격에 들배지기를 주 무기로 하는 장지영은 그동안 씨름팬들에게는 지명도가 떨어졌던 선수. 그러나 3회 천하장사 대회에서는 작심한 듯 샅바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신경전을 전술적으로 활용하면서 상대의 기를 빼놓는다. 그러나 지루한 샅바싸움으로 인해 보는 관중들마저 지루함에 빠뜨리면서 비난의 화살을 받게 된다.


특히 1-1로 맞선 홍현욱과의 세 번째 판에서는 무려 20여 회나 샅바를 잡았다 놓는 신경전을 펼치면서 도중에 심판이 바뀌는 해프닝까지 일어나게 된다. 결국 지루한 샅바싸움 신경전 속에 신경이 예민해진 홍현욱을 무너뜨린 장지영은 8강에 올라서도 지루한 샅바싸움을 대놓고 벌인다. 4강전 이준희와의 대결에서도 장지영은 집요한 샅바싸움을 펼친 끝에 변칙공격으로 이준희를 무너뜨린다.


결국 이만기, 이준희, 홍현욱 등의 BIG 3가 모조리 나자빠진 3회 천하장사 대회 결승전은 장지영과 유기성(현대중공업)의 맞대결로 펼쳐진다. 장지영은 결승전에서도 지루한 샅바싸움을 펼치면서 관중들의 비난과 야유를 한 몸에 받는다. 기존의 강호들이 모두 탈락한 가운데 김이 빠진 관중들은 화끈한 씨름보다는 지루한 샅바싸움으로 일관하는 장지영의 모습이 성에 찰리 없었다. 비난과 야유에도 아랑곳 않고 장지영은 일관되게 샅바싸움 전략을 펼친 끝에 유기성을 3-1로 뉘이고 생애 첫 천하장사에 등극하게 된다. 아무도 예상 못한 대이변 속에 3회 천하장사 대회는 막을 내리지만 여러 가지 논란을 낳았고 심판의 자질 부족이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경기가 끝난 후 시청자들의 항의 전화가 방송사와 신문사로 빗발쳤다고 한다. 지금 시대였다면 각종 포털사이트 게시판이 장지영에 대한 비난글로 도배되었을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지영 본인의 입장으로 볼 때 이기기 위한 씨름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평소 들배지기를 주 무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샅바 주도권을 점유하지 못할 경우 그만큼 자신의 기술 구사가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씨름에서 샅바의 주도권을 쥐는 것은 경기의 6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지영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략적인 씨름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만기의 화려한 기술씨름에 눈높이가 금세 높아진 관객들은 장지영의 전략을 곱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필자도 당시 가족, 친척들과 함께 3회 천하장사 대회 결승전을 시청하면서 샅바싸움으로 일관하는 장지영이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 없었다.



비록 천하장사 등극 전까지 무명이었지만 장지영의 그 전의 씨름 이력도 결코 다른 강자들에 비해 밀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78년 당시 중3 때 당대 최고의 천하장사 김성률 장사와 맞붙어 전혀 밀리지 않는 팽팽한 승부를 펼칠 만큼 가능성을 인정받았던 선수였고, 천하장사 대회 개최 직전에는 이만기와도 늘 팽팽한 접전을 펼쳤던 바 있다. 또한 학과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인하대 경영학과 재학 중 학점이 늘 4.5점 만점에 3.2점 이상을 받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훈훈한(?) 이력은 전부 '샅바싸움'의 오명에 묻히게 되었고, 3회 천하장사 대회는 역대 천하장사 대회 중 가장 논란이 많았던 대회로 남게 되었다.


3회 천하장사 대회 최종 순위 - 천하장사 장지영(인하대), 1품 유기성(현대중공업), 2품 이준희(일양약품), 3품 손상주(영남대), 4품 김종렬(경남대), 5품 장용철(부산 공동어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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