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6회~8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1983년 정식 출범한 천하장사 씨름대회는 이만기라는 슈퍼스타를 낳으면서 출범 3년 차만에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된다. 일제시절 민족 말살 정책에 의해 존립자체가 불투명해 보였던 씨름은 비록 당시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에 의해 부활되는 아이러니를 겪었지만, 전통 스포츠가 부활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를 둘 수 있었다.
출범 3년 차, 럭키 금성(현재 LG) 씨름단이 새로 창단하여 이봉걸, 손상주 등의 스타급 선수들을 대거 스카우트하여 돌풍을 예고하였다. 스타급 선수 외에도 이만기를 키워낸 스승 황경수 경남대 감독도 코치로 영입하였는데, 이는 경남대 졸업반인 이만기를 영입하기 위한 사전 작업의 일환이었다. 스승을 스카우트한 것 외에도 럭키금성은 이만기와 CF 계약을 맺으면서 4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출연료를 안겨다 주었다. 이만기에 대한 배려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장 스승이 떠나버려 훈련계획이 막막해진 이만기로 하여금 럭키금성 씨름단 훈련에 합류하여 같이 훈련하게 하는 특급대우를 해준 것이다. 함께 훈련하면서 이만기는 자연스레 이봉걸, 손상주 등 자신의 잠재적 라이벌들과 자연스레 스파링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1985 천하장사 대회를 앞두고 과연 이만기의 독주체제가 지속될 것인지가 큰 관심사였다. 언론이 꼽은 이만기의 대항마로는 5대 천하장사 이준희, '인간 기중기' 이봉걸, 다크호스로 급부상한 고경철, 황영호 등이 꼽혔다. 많은 팬들의 관심 속에 제6회 천하장사 대회가 1985년 3월 18일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다. 장충체육관은 1만여 명의 관중들로 빼곡히 들어찼다.
1984년 5회 대회에서부터 체중을 늘려 백두급으로 출전한 이만기는 급격하게 늘어난 체중 탓인지, 민첩성이 둔화된 모습이었다. 결국 4강전에서 손상주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이만기는 6회 대회를 앞두고 백두급에 확실히 적응하기 위한 강훈을 거듭하였다. 또한 체중 증가에 의한 민첩성 둔화를 막기 위해 하루 1시간씩 배드민턴을 쳤다고 한다.
하루 6~8시간의 강훈을 거듭한 결과는 6회 대회에서 바로 나타났다. 8강전에서 이봉걸, 4강전에서 손상주 등 럭키금성 씨름단의 간판스타들을 연달아 눕히고 결승에 올라온 이만기는 5대 천하장사 이준희 마저 3-1로 가볍게 제압하고 통산 네 번째 천하장사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시즌 시작 전 이만기의 대항마로 꼽히던 이봉걸, 손상주, 이준희 등 강자들을 차례로 뉘이고 정상에 오른 이만기는 대적할 적수가 없음을 만천하에 널리 알렸다.
1985년 6월 26일 전주에서 열린 제7회 천하장사 씨름대회에서 이만기는 다시 한번 최강의 자리에 등극한다. 이만기의 천적으로 부각되던 고경철을 제압하고 결승에서도 손상주를 3-0으로 완파하며 1983년 1회, 2회 대회를 연속으로 석권한 이후 2년 만에 6회 대회, 7회 대회를 연속으로 거머쥐게 된다.
하지만 이만기에게는 약간의 행운도 따랐다. 천하장사 대회와 함께 펼쳐진 백두장사 결정전에서 이만기는 황영호(동아대)에게 4강전에서 덜미를 잡힌 바 있다. 황영호는 여세를 몰아 백두장사에 등극하며 유력한 천하장사 후보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발목 부상으로 인해 천하장사 대회에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시 붙었을 경우 기술과 상황 대처에 능수능란한 이만기가 또다시 덜미를 잡힌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이만기와의 상대전적에서 앞서던 황영호였고 당시 최고의 상승세를 유지했었던 만큼, 만약에 두 선수가 천하장사 대회에서 다시 맞붙었다면 그 결과는 예측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경남대 졸업을 앞두고 있던 이만기의 행선지가 과연 어느 팀이 될 것인지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만기를 스카우트하는 즉시 새롭게 씨름단을 창단하려는 기업들도 여럿 있었다. 민속씨름 '최대어' 이만기의 행선지는 당초 럭키금성이 유력해 보였다. 그러나 이만기와 황경수 감독에 대해 왕회장의 강력한 영입 의지가 전해진 현대는 이만기에게 국내 스포츠 사상 최고 계약금인 2억 원을 안겨주면서 해체되었던 씨름단을 새로 창단하게 된다. 공들이던 이만기를 놓친 럭키금성은 황경수 감독까지 덩달아 빼앗기게 된다. 당초 럭키금성행이 유력시되던 이만기의 현대행은 큰 파장을 낳았고, 럭키금성과 이만기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게 된다.
1985년의 마지막 천하장사를 가리는 대회는 10월 4일 펼쳐졌다. 하지만 1985년의 마지막 천하장사를 가리는 결승전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게 된다. 결승전 대결은 천하장사 3연패를 노리는 이만기와 5대 천하장사 이준희 간의 맞대결로 이루어졌다. 이만기는 첫 판을 먼저 가볍게 따내고 두 번째 판에서도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공격하는데 두 선수는 동시에 넘어지게 된다. 이만기보다 이준희가 먼저 모래판에 닿은 것으로 보였지만, 합의 판정을 통해 이준의 승리로 판정이 내려진다.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은 이만기는 세 번째 판에서 이준희에게 기습적인 덧걸이를 내주면서 1-2로 끌려가게 된다. 이만기는 좀처럼 두 번째 판의 판정 결과로 인해 불만이 머리 끝까지 치솟은 모습이었다.
결국 네 번째 판을 앞두고 이만기는 더 이상 모래판에 올라가지 않고 퇴장한다.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져 나왔고, 결국 민속씨름 사상 최초로 몰수게임이 선언된다. 이준희는 1년여 만에 천하장사에 등극하지만 무언가 개운치 않은 모습이었다.
이만기의 퇴장 몰수패는 큰 파장을 낳았는데, 대한씨름협회의 징계조치는 지금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특급 울트라 슈퍼급의 징계를 한꺼번에 쏟아붓는다. 벌금 1천만 원에 2등 상금 몰수 그리고 일간지에 5단 이상의 공개사과문을 게재하는 조치였던 것이다. 벌금을 부과한 것도 모자라 상금까지 몰수하는 것도 성에 안차 일간지에 사과문까지 게재하게 한 조치는 슈퍼스타에 대한 견제심리와 괘씸죄가 한꺼번에 적용된 듯한 모습이었다.
징계조치가 너무 과했다는 비난여론을 의식한 듯 대한씨름협회는 일간지 공개사과 조치는 철회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1985년 씨름판은 역시 이만기임을 입증한 한 해였다. 기존의 이준희 외에 이봉걸, 손상수, 고경철, 황영호 등 신흥 강호 등이 이만기의 대항마로 거론되었지만 힘과 기를 겸비한 이만기를 모래판에 눕히기에는 여간 버거운 것이 아니었다.
이쯤 되면 이만기의 일방독주 시대로 흘러갈 듯한 분위기였는데, 이듬해 1986년부터 새로운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어 씨름판에 새로운 재미를 제공하게 된다. 1985년 씨름판에 대한 추억은 여기까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