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9회~1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1983년 새로 출범한 민속씨름은 이만기라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에 힘입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음과 동시에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된다.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총 8차례 치러진 천하장사 대회에서 이만기는 무려 5번이나 천하장사에 등극하면서 민속씨름의 제왕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정상에 올라선 자는 외로운 법. 이만기는 씨름을 너무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시기 어린 질투와 시샘을 감당해야만 했다. 심지어는 이만기가 너무 독주를 하니까 씨름이 재미없어진다는 푸념이 나오기도 하였다.
1985년 마지막에 치러진 8회 천하장사 대회에서 이만기가 몰수패를 당한 것도 어찌 보면 잘 나가는 스타에 대한 일종의 견제심리도 상당 부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만기를 통해 씨름의 묘미에 빠져들고 열광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만기가 너무도 완벽하게 잘하다 보니 대중들은 은연중에 견제심리가 발동하고, 새로운 라이벌의 등장을 바라게 된다.
스포츠는 라이벌이 있어야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라는 라이벌이 없었다면 메이저리그는 지금과 같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힘들었을 것이며, 최동원과 선동열이라는 당대 최고 투수의 맞대결을 통해 국내 프로야구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함과 동시에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다.
만약 1986년에도 이만기의 독주시대가 지속되었다면 씨름의 인기는 시들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로운 라이벌이 등장하며 싱거워질 수 있는 모래판에 긴장감과 흥미를 불어넣게 된다. 그 주인공은 이준희도 홍현욱도 황소 같은 힘을 자랑하는 신성 황영호도 아니었다. 민속씨름 선수 중 최장신인 205cm의 거구 '인간 기중기' 이봉걸이었다.
충남대 재학 시절만 하더라도 키만 멀대같이 컸을 뿐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제풀에 쓰러지는 경우가 많아 허울 좋은 장대 선수로 인식되었던 이봉걸은 럭키금성에 입단 이후, 이중근 감독의 지도 하에 체계적인 조련을 받으면서 기량이 일취월장하게 된다.
이봉걸의 존재감을 처음 드러낸 대회는 1986년 3월에 펼쳐진 체급별 장사씨름 겸 천하장사 대회였다. 백두급 8강전에서 이봉걸은 이만기를 눕히는 이변을 연출하며 결승까지 진출한다. 하지만 이준희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준우승에 만족해야만 했다.
8강전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이만기는 절치부심하여 이봉걸 공략법에 몰두한다. 두 선수는 이틀 뒤 천하장사 결정전 8강전에서 다시 맞붙게 된다. 첫 판을 내주었지만 이만기는 내리 두 판을 따내고 결승까지 진출하여 떠오르는 새별 황영호를 3-0으로 제압하고 천하장사에 복귀한다.
1985년 8회 천하장사 결승전에서 불명예스러운 몰수패를 깨끗이 털어내는 의미 깊은 승리였다. 이만기는 천하장사에 등극했지만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이봉걸의 존재감에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이봉걸의 달라진 힘은 1986년 6월에 펼쳐진 10회 천하장사 대회에서 마침내 빛을 발하게 된다. 생애 첫 백두장사에 등극한 여세를 몰아 이봉걸은 천하장사 결승전에서 이만기를 상대로 3-1의 승리를 거두면서 생애 첫 천하장사에 등극하는 감격을 누리게 된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불우한 시절을 딛고 천하장사에 오른 이봉걸의 등장은 모처럼 씨름판에 새로운 흥미를 창출하게 되고 이만기와의 불꽃 튀는 라이벌전을 예고하게 된다.
이봉걸은 충남대 시절에는 좀처럼 자신의 큰 키를 활용하지 못했지만, 럭키금성에 입단 이후 잘 먹고 잘 훈련받으면서 힘과 스피드가 몰라보게 좋아진다. 지금도 필자의 기억에 선명한 장면은 이봉걸과 이만기가 맞붙으면 이봉걸이 늘 취하는 전략이 있었다. 일단 샅바를 잡고 일어서서 주심의 휘슬이 울리기가 무섭게 이봉걸은 오른 다리를 뒤로 재빨리 빼내면서 이만기가 자신의 다리샅바를 제대로 쥐지 못하게 힘을 분산시킨다. 그다음에 자신의 키를 이용한 밀어 치기 공격으로 이만기를 넘어뜨리는 것이다. 반대로 이봉걸이 자신의 다리를 제대로 빼지 못할 경우 영락없이 이만기의 장기인 들배지기 공격이 시도되고 인간 기중기는 마치 전봇대가 쓰러지듯이 모래판에 고꾸라지게 된다.
두 선수의 맞대결은 그 짧은 순간에 서로의 필승전략이 쉴 새 없이 오고 가며 강한 임팩트를 발휘한다. 상식적으로 2m가 넘는 거구가 밀어붙이면 당연히 넘어가기 십상인데, 182cm의 이만기는 자신보다 20cm 이상이 큰 거구를 상대로 남들보다 두 배 이상 두꺼운 장딴지의 힘으로 버티면서 반격의 기회를 마련하는 모습에서 씨름의 짜릿한 묘미를 전해준다.
이봉걸에게 백두장사와 천하장사를 내리 내준 이만기는 3개월 뒤 펼쳐진 제11회 천하장사 결정전에서 이봉걸과 다시 맞붙어 3-0으로 깨끗이 설욕하고 다시 왕좌에 복귀한다. 총 11회 치러진 천하장사 대회에서 이만기는 무려 7회나 천하장사를 석권하는 기염을 토한다.
6월만 하더라도 이봉걸의 전성시대가 당분간 지속될 것처럼 보였지만 이만기는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완벽하게 설욕에 성공하면서 모래판의 제왕이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입증한다.
이만기가 세 번 치러진 천하장사 대회에서 두 차례나 왕좌를 가져갔지만 '인간 기중기' 이봉걸의 등장은 모래판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면서 씨름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