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4대, 15대 천하장사에 연거푸 등극한 이만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로 더 많은 추억거리가 소환된 1988년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국제 행사인 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해였고, 직선제 개헌을 통해 선출된 대통령의 임기 첫 해, 사상 첫 전직 대통령 및 관계 인사들에 대한 청문회 개최 등 굵직한 이슈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사회, 문화 전 방위에 걸쳐 많은 변화가 발생한 시기였다.
하지만 모래판에서만큼은 기존의 왕좌를 나눠 갖던 강호들이 좀처럼 변화의 틈을 내주지 않았다. 지금부터 1988년의 모래판을 소환해본다.
1988년 2월 번외 대회인 통일 천하장사 씨름대회가 개최되었다. 프로와 아마 각각의 상위 랭커 16명, 합계 32명이 출전한 이 대회에서 결승은 1987년 정상의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이던 라이벌 이만기(현대중공업)와 이봉걸(럭키금성)의 맞대결로 펼쳐졌다.
첫 판은 이만기가 내줬지만 이후 내리 세 판을 따내면서 통일 천하장사 자리에 등극하였다. 당시 경향신문 기사에선 이만기의 승리를 두뇌싸움의 승리라고 분석했는데, 발췌한 기사의 일부분에선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올해의 연봉 재조정에서 이민기와 똑같은 5천만원의 연봉 인상을 요청, 소속팀과 신경전을 폈던 이봉걸은 지난해의 3천5백만원에서 4천만원으로 5백만원을 인상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역시 두뇌회전에선 이만기에 1천만원어치쯤 뒤지고 있음을 보여준 한판이었다.'
두뇌회전에서 1천만원어치쯤 뒤지고 있음을... 이 부분에서 이봉걸이 보면 다소 불편하게 들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8년의 첫 천하장사 대회는 5월 22일 부산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대회를 앞두고 1988년 첫 천하장사 대회 판도를 분석한 기사가 나왔는데, 기존의 강자 이만기 외에 변칙기술의 달인 고경철(현대), 백전노장 홍현욱(삼익가구), 프로무대 데뷔 2년 차 신예 황대웅(삼익가구), 역도에서 씨름으로 전향한 이민우(삼익가구) 등을 우승후보로 전망했다.
기사의 타이틀은 상당히 거창하다. '이만기 아성에 쿠데타 풍랑'. 씨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기사 헤드라인만 보면 이만기 아성을 위협하는 새로운 강자들이 대거 출현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헤드라인은 일종의 낚시성 문구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정치판에 3金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있었다면 모래판에는 3李(이만기, 이준희, 이봉걸)가 있었는데, 이 중에서 이준희는 1987년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고 이봉걸은 연습 도중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시즌 아웃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상대적으로 이만기를 위협할 강자가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 흥미 유도를 위해 그리고 새로운 강자의 출현을 기대하는 바람에서 좀 더 자극적인 헤드라인 기사가 탄생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14대 천하장사는 예상대로 이만기가 차지하였다. 하지만 결승 상대는 고경철도, 홍현욱도, 황대웅도 아닌 뒤집기의 달인 '털보' 이승삼이었다. 이승삼은 생애 최초로 천하장사 결승에 진출했다. 한라급의 이승삼은 8강에서 장지영(일양약품), 4강에서 황대웅(삼익가구) 등 백두급의 강호들을 연달아 연파하고 결승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털보라는 트레이드 마크와 더불어 현란한 뒤집기 기술로 개성 있는 씨름을 선보인 이승삼은 자신의 고향 후배인 이만기에게 1-3으로 패하면서 아쉽게 천하장사 획득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만기는 자신의 고향 선배이자 씨름의 멘토였던 이승삼을 꽃가마에 태우고 행진하는 최대의 예우를 보였다.
당시 TV 중계에서 이승삼이 아쉬움에 북받친 나머지 울먹이며 인터뷰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14대 천하장사 대회는 왕좌를 수성한 이만기보다 이승삼의 아름다운 도전이 더 인상적이었던 장면으로 기억에 자리하고 있다.
88 서울 올림픽 개막 (9월 17일)을 3일 앞두고는 올림픽을 기념한다는 명제 하에 올림픽 천하장사 대회가 펼쳐졌다. (장사씨름대회와 동시 개최) 씨름의 상징성을 알리기 위해 용인 한국민속촌에서 무대가 마련된 이벤트성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는 잔기술의 달인 고경철(현대)이 준결승에서 이만기를 2-1로 제압 후 결승에서는 경남대의 강광훈을 3-1로 누르고 올림픽 천하장사에 등극하였다.
올림픽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10월 5일 수원에서 15대 천하장사 대회가 개최되었다. 1988년의 마지막 공식 천하장사 대회였다. 이만기는 이전에 열린 세 차례의 천하장사 대회(번외경기 포함)에서 2차례 정상에 오르며 건재를 과시했다. 하지만 장사씨름대회 백두급에서는 6번 중 2번만 정상에 오르고 나머지는 고경철, 황대웅 등 떠오르는 스타들에 발목을 잡히면서 불안감을 노출하였다.
6년 가까이 지켜온 이만기 천하도 서서히 쇠퇴의 조짐을 보인다는 징후라고 언론의 기사가 이어졌다. 이만기 본인도 위기의식을 느꼈을 터.
하지만 그가 모래판의 왕좌에 공짜로 올라선 것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입증했다. 스타는 큰 경기에 강하다는 속설처럼 거짓말처럼 이만기는 결승까지 진출했다. 이 대회와 겸해 열린 38대 백두급 경기에서 16강 탈락(황대웅에 패배)이라는 고배를 들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결승 상대는 3대 천하장사였던 장지영(일양약품). 장지영은 1984년 3대 대회에 이어 두 번째로 천하장사 결승에 진출하였다. 3대 대회에서 샅바싸움 끝에 장사를 획득했다는 오명을 쓴 장지영은 자신의 두 번째 결승 무대에서도 전례 없이 샅바싸움으로 이만기와 신경전을 펼쳤다. 하지만 1988년 15대 대회에서만큼은 그의 기술씨름이 더 돋보였다. 특유의 잡치기와 되치기 기술로 장지영은 이만기를 물고 늘어졌다.
마지막 판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이만기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들배지기로 장지영을 모래판에 내다 꽂고 왕좌의 포효를 뿜었다. 장지영은 막판까지 이만기의 들배지기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한 번 걸리면 빠져나올 수 없는 이만기의 들배지기 위력 앞에 4년 만의 천하장사 등극 직전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이만기는 마음고생이 심했던 듯 그 어느 때보다 절규에 가까운 포효를 내질렀다. 그의 스승인 황경수 감독도 평소와는 다르게 진한 눈물을 쏟아댔다. 올림픽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펼쳐진 수원 천하장사 대회 결승전에는 1만 3천여 명의 씨름팬이 수원 실내체육관을 가득 메웠으며, 이는 1대 천하장사 대회 당시 장충체육관에 운집했던 최다 관중 기록(1만 1천 명)을 넘어서는 수치였다.
1988년의 마지막 천하장사 대회 결승에서 이만기와 장지영 모두 사상 유례가 없는 기술씨름의 대접전을 보여주었다. 백두급이지만 육중함보다는 다이내믹함과 세심한 손기술에 의해 승패가 좌우되는 기술씨름에 팬들은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공식 천하장사 대회에서 9번째 정상에 오른 이만기는 11월에 열린 번외경기 일본 천하장사 대회마저 접수하며 자신의 건재를 과시했다. 황제의 포효는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 모래판 판도를 뒤집을 토네이도급 센세이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