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판의 세대교체 광풍이 불어 닥친 1990년 민속 씨름판
민속씨름의 화려한 르네상스가 열렸던 1980년대가 지나고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모래판에는 새로운 기운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민속씨름의 중흥기를 열어젖히고 전무후무한 천하장사 10회라는 위업을 달성한 '모래판의 황제' 이만기가 서서히 노쇠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만기는 이미 1988 시즌 이후 여러 차례 은퇴 의사를 밝혔고, 1989년 7월, 12월에 연달아 공식적으로 은퇴를 표명했지만 다시 번복하기도 했다. 체력적, 정신적으로 이만기는 정상에서 내려올 조짐을 이미 보이고 있었다.
이와 맞물려 1989년 여름부터 모래판에 깜짝 돌풍을 일으킨 10대 장사 강호동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모래판을 접수하기 위한 채비를 갖춰 나갔다.
1990년 1월에 번외 대회로 열린 통일 천하장사 씨름대회에서 이만기가 남동하, 문성식, 이승삼, 이봉걸 등을 상대로 단 한판도 내주지 않고 결승에 진출했고, 결승에서도 차세대 돌풍의 주역 중 한 명인 임용제(조흥금고)를 상대로 3-0 완승을 거두는 쾌조의 경기력을 과시하며 1990년대 첫 장사에 등극하였다.
기대를 모았던 강호동과의 맞대결은 성사되지 않았다. 16강에서 강호동은 노장 고경철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조기 탈락했다.
1990년 3월, 1990년대 첫 천하장사를 가리는 18대 천하장사 씨름대회 겸 47회 체급별 장사씨름 대회가 성남에서 개최되었다. 직전까지 상대 전적 2승 2패로 호각세를 보였던 이만기와 강호동은 마침내 이 대회에서 두 차례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첫 번째 맞대결은 백두급 결승에서 펼쳐졌는데 강호동이 3-1로 승리를 거두면서 1989년 11월 백두급 결승에서 당한 패배를 설욕함과 동시에 8개월 만에 백두장사에 복귀하였다.
가장 최정상의 자리에 올라선 후에 은퇴하기로 결심한 이만기로서는 강호동이 가장 껄끄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체급별 장사 씨름대회에서 강호동에게 왕좌를 내줬지만 이만기는 천하장사 대회에서 설욕을 노리고 있었다.
이틀 뒤, 두 선수는 천하장사 대회 4강에서 다시 맞붙게 되었다. 신구세대를 대표하는 거물급 장사들 간의 맞대결은 이 대회의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다. 두 선수는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좀처럼 승부가 결정 날 것 같지 않던 찰나에 강호동의 샅바를 모두 놓친 이만기는 당연히 경기가 중단된 줄로 여겼으나 심판의 휘슬은 불리지 않았고, 이 순간 강호동은 저돌적으로 이만기에게 달려들어 그를 모래판에 눕힌다.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는다는 규정에 의해 첫 번째 판은 그대로 강호동의 승리로 연결되었다. 이만기의 입장에선 억울함이 충분히 느껴질 수 있는 판정이었다. 허무하게 첫 번째 판을 내준 이만기는 평정심과 집중력이 급격히 떨어졌고, 결국 두 번째 판도 강호동에게 밀어 치기로 허무하게 내주고 말았다.
체력적으로 하향세에 접어든 이만기로서는 182cm, 120kg로서 자신과 비슷한 체형을 보유하고 힘과 유연성이 절정에 오른 강호동에게 자신의 주특기인 들배지기를 수월히 구사할 수 없었던 것이 상대적으로 열세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결승에서 강호동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변을 일으킨 한라급의 유영대(럭키금성)와 맞붙었고 손쉽게 3-0 완승을 거두면서 사상 처음이자 역대 최연소 천하장사에 등극하는 기염을 토한다. 1970년 6월생 강호동은 19세 9개월이던 1990년 3월에 모래판에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유영대는 준결승에서 17대 천하장사 김칠규(현대)에 2-1로 승리를 거두면서 돌풍을 일으켰지만 강호동의 기세는 너무도 막강했다.
강호동은 같은 해 7월 춘천에서 열린 19대 천하장사 대회 결승에서 또 다른 세대교체의 주역 중의 한 명인 남동하(현대)를 3-1로 제압하고 이만기 이후 처음으로 천하장사에 2회 연속 등극하면서 모래판의 세대교체에 확실한 정점을 찍게 된다.
1983년 민속씨름 원년부터 씨름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모래판 1세대 선수들 (이만기, 이봉걸, 고경철, 손상주, 이승삼 등)은 거침없는 패기로 무장한 2세대 선수들 (강호동, 황대웅, 남동하, 임용제, 이기수 등)에 확실히 밀리는 양상을 보였다.
1980년대 중반 이만기, 이준희와 더불어 모래판의 3李 시대를 주도했던 '인간 기중기' 이봉걸 장사가 부상으로 인한 회복기간이 늦어지면서 결국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현역 장사들 중 강호동을 상대로 유일하게 4전 전승을 거두면서 '강호동 킬러'의 면모를 과시했던 이봉걸은 씨름 선수로서는 환갑이라 할 수 있는 33세의 나이에 체력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결국 모래판을 내려오게 된다.
한라급에서 화려한 기술로 많은 인기를 모았던 '오뚝이' 손상주, '털보' 이승삼도 현역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민속씨름 1세대의 주역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가운데, 은퇴를 세 차례나 번복했던 '모래판의 황제' 이만기도 1990년 9월 마침내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씨름협회에서 모래판을 떠나는 1세대 선수들을 대상으로 제대로 된 공식 은퇴 경기나 행사를 마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나 이만기는 씨름을 단숨에 국민 스포츠로 도약시킨 일등 공신이다. 그가 민속 씨름에 공헌한 부분을 감안하면 요즘 시대에는 이런 푸대접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비단 이만기에만 국한된 사항이 아니었다.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인 프로야구의 슈퍼스타였던 최동원, 이만수, 김시진, 장효조 등도 변변한 은퇴식도 치르지 못한 채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스포츠 스타에 대한 예우나 스토리텔링 등에 대한 관심이 전무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만기가 떠난 후 처음 치러진 20대 천하장사 대회에서도 강호동은 당시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황대웅(삼익가구)과 치열한 접전 끝에 3-1로 역전승을 거두면서 이만기 (14대~16대) 이후 처음으로 천하장사 대회를 3회 연속으로 석권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야말로 모래판에 강호동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음을 화려하게 선포하였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선배 선수들을 대상으로 능글맞은 미소로 샅바싸움 신경전을 펼치고 승리 후에는 괴성을 질러대며 포효하고 특유의 유연한 몸으로 텀블링까지 불사하는 강호동은 이미 이때부터 엔터테이너의 끼를 보이고 있었다. 다만 왕성한 혈기를 주체하지 못해 데뷔 초반에는 어느 스포츠보다 상호 간에 예의를 중시하는 씨름에서 버릇이 없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대회를 거듭할수록 성숙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민속씨름의 패권은 강호동에 의해 확실하게 접수된 듯 보였으나 1990년 마지막 대회로 펼쳐진 11월 체급별 장사씨름 대회 백두급 결승전에서 대학 최강자 출신의 임종구(럭키금성)가 특유의 잔기술로 강호동을 3-1로 제압하면서 백두장사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이 대회 우승을 통해 임종구는 강호동, 황대웅, 남동하 등과 함께 새로운 천하장사 후보군으로 급부상했다. 임종구 외에도 강호동의 뒤를 이어 새로운 10대 장사 돌풍의 조짐을 보인 박태일(일양약품), 150kg의 슈퍼 거구임에도 유연함을 과시하는 '람바다' 박광덕(럭키금성), 기술씨름으로 돌풍을 일으킨 지현무(현대) 등이 새로운 다크호스로 떠오르면서 1990년 모래판은 확실한 세대교체를 이루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 변화의 광풍이 극심했던 1990년 모래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