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강자는 없음을 증명한 모래판의 대혼전
민속씨름 역사상 가장 큰 지각변동이 일어났던 1990년 이후 모래판의 주역들은 순식간에 세대교체를 이루었다. 민속씨름 1세대 주역들이 대거 은퇴한 가운데 고경철(현대)만이 유일한 1세대 멤버로 남게 되었다.
1990년에 열린 천하장사 3개 대회를 싹쓸이하면서 '황제'에 등극한 강호동이 과연 1991년 모래판도 접수할 것인지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하지만 1990년 11월 백두급 장사에 등극한 임종구(럭키금성), 이만기 은퇴 후 소속팀 현대에서 '포스트 이만기'로 집중 육성 중인 남동하(현대), 부상에서 복귀 후 권토중래를 노리는 황대웅(삼익가구) 등이 강호동을 견제할 강력한 대항마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수성의 위치에 올라선 강호동의 1991년은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소속팀 일양약품과의 연봉협상이 좀처럼 타협점을 찾지 못했고 양측의 감정싸움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강호동은 명색이 프로 스포츠임에도 불구하고 선수가 구단의 동의 없이 평생 소속팀을 변경할 수 없는 계약을 두고 '노예계약'이라 강력히 비판하면서 소속팀과 대립각을 세웠다.
강호동의 연봉협상을 두고 당시 언론에서는 지극히 상반되는 톤으로 강호동을 묘사했는데, 경향신문의 경우 강호동을 '모래판의 반항아'로 지칭하면서 아래와 같이 부정적인 톤으로 강호동을 묘사한다.
'자신을 이기고 환호하는 상대방에게 모래를 뿌리고 심판에게 욕설을 하는가 하면 때론 팀을 무단이탈하기도 하고 시합 때마다 괴성과 함께 요란한 제스처로 반항아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해온 강호동'
반항아를 넘어 거의 패륜아로 인식될 지경이다.
이후 연봉협상 과정에서 구단에 백기 투항한 강호동을 당시 발발했던 걸프전에서 다국적군에 공략당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에 비유하는 비약적인 표현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반면 한겨례신문은 연봉협상을 진행하는 강호동을 두고 선수에게 불리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 씨름단의 노비 계약의 불합리에 반기를 든 정의로운 투사의 이미지로 표현했다.
1991년 설 연휴에 펼쳐지는 통일 천하장사 대회가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호동과 소속팀 일양약품 간의 연봉협상은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연봉협상 타결을 마무리하지 못한 강호동은 통일 천하장사 대회에 불참하게 된다.
프로와 아마 선수들이 모두 참여하는 통일 천하장사 씨름대회는 비록 공식 천하장사 대회는 아니지만 프로와 아마 선수들이 한데 모여 실력을 겨룬다는 측면에서 상징성이 있는 대회였다. 천하장사 자리에 올라 있는 강호동이 불참하면서 다소 맥이 빠졌지만, 프로씨름 신흥 강호로 급부상한 임종구, 남동하, 황대웅 등과 다크호스로 떠오른 박태일, 지현무, 그리고 아마에서 최강의 실력을 과시하고 있는 김정필, 성동춘 등이 전부 참가하면서 대회 전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다.
장충체육관에서 거행된 통일 천하장사 씨름대회에서 임종구가 결승에서 황대웅을 3-1로 제압하고 사상 처음으로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전년 11월 백두급 장사에 이어 통일 천하장사까지 제패한 임종구는 3월에 예정된 21대 천하장사 대회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오른다.
소속팀과 좀처럼 연봉협상 마무리를 진행하지 못한 강호동은 마침내 3월 일양약품에 사실상 백기투항하면서 복귀하게 된다. 천하장사 대회를 3주가량 남긴 시점에서 전격 복귀한 강호동은 사상 최초의 천하장사 4연패에 도전하기 위해 훈련에 집중하게 된다.
3월 22일 부산에서 개막한 21회 천하장사 대회 겸 54회 체급별 장사 씨름대회를 앞두고 기존 천하장사 강호동의 아성을 과연 임종구, 황대웅, 남동하 등의 신예 강호들이 무너뜨릴 수 있는가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강호동은 연봉협상 지연에 따른 훈련 부족에도 불구하고 54대 백두장사에 등극한다. 준결승에서 숙적 남동하에게 첫 판을 내줬으나 내리 두 판을 따내면서 결승에 오른 것이 가장 큰 고비였다. 오히려 결승에서는 팀 동료 한병식이 준결승에서 53대 백두장사 임종구를 제압한 덕분에 손쉽게 백두장사를 탈환할 수 있었다.
강호동의 천하장사 4연패가 유력해 보였지만 스포츠는 늘 의외성과 변수가 도사리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백두장사 결정전 당시 16강에서 조기 탈락했던 황대웅(삼익가구)은 천하장사 대회에서 불곰의 위력을 되찾으며 준결승에서 천하장사 4연패를 노리던 강호동에 2-1로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에서는 53대 백두장사 및 91년 통일 천하장사를 거머쥔 임종구(럭키금성)와 맞붙게 된다. 황대웅은 무릎 부상 후유증으로 인해 자신의 전매특허였던 들배지기를 더 이상 구사할 수 없었지만 노련함을 바탕으로 상대의 중심을 역이용한 잡치기, 밀어 치기 등의 잔기술을 통해 단시간에 승부를 결정짓는다.
임종구에게 3-1로 승리를 거두는 과정에서 황대웅이 세 판을 이기기 위해 기술을 발휘한 시간은 불과 5초 남짓이었다. 시원한 들배지기 대신 전광석화 같은 잔기술로 황대웅은 마침내 천하장사에 등극한다. 아마 무대를 평정하면서 1987년 고교 졸업 후 곧바로 프로 무대에 데뷔한 황대웅은 데뷔 당시 모래판을 지배하던 3李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의 위력에 좀처럼 자신의 잠재력을 펼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고질적인 무릎 부상에 시달리면서 은퇴까지 고려할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황대웅은 특유의 성실함을 바탕으로 인내의 시간을 보냈고 강호동의 천하장사 4연패를 직접 막아내고, 당시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던 임종구마저 눕히면서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황대웅은 6월 이리(익산의 옛 지명)에서 열린 22회 천하장사 대회에서 또다시 결승에 진출한다. 상대는 154kg의 거구 박광덕(럭키금성). 박광덕은 자신의 힘을 활용한 들배지기 기술로 돌풍을 일으키는데 16강에서 최강자로 군림하던 강호동을 2-0으로 제압했고, 8강에서는 17대 천하장사 김칠규마저 눕히는 파죽지세로 결승에 오른다.
결승에서도 박광덕은 들배지기로 먼저 두 판을 따내면서 민속씨름 데뷔 4개월 만에 천하장사 등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황대웅은 물러서지 않고 노련하게 박광덕의 중심을 무너뜨리면서 밀어 치기, 잡치기 등으로 극적인 뒤집기 승부를 연출한다.
천하장사 결승에서 사상 처음으로 두 판을 먼저 내주고 리버스 스윕으로 천하장사 타이틀을 거머쥔 황대웅은 이만기, 강호동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천하장사 2개 대회를 연속으로 석권하게 된다. 박광덕은 강호동에 이어 또 다른 '10대 천하장사' 등극을 눈앞에 두었으나 노련한 황대웅의 경기 운영에 말리면서 아쉽게 천하장사 1품에 머무른다.
1990년 천하장사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강호동은 연봉협상 지연에 의한 훈련 부족으로 인해 21대, 22대 천하장사 대회에서는 연거푸 고배를 마신다. 그러나 백두장사는 54대부터 57대까지 내리 4 연속으로 거머쥐면서 이준희 이후 처음으로 백두장사 4회 연속 우승에 성공한다.
58대 백두장사 대회에서는 16강전에서 라이벌 남동하(현대)에게 일격을 당하면서 백두급 5회 연속 우승에 실패한다. 그러나 이틀 뒤 열린 23회 천하장사 대회에서 강호동은 결승에서 다시 만난 남동하를 자신의 전매특허인 들배지기와 들어치기를 활용해 3-0으로 제압하면서 1년 만에 천하장사에 복귀한다.
이만기로 대표되는 1세대 민속 씨름 장사들의 은퇴 이후, 2세대 민속 씨름 장사들의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펼쳐진 1991년 모래판은 팽팽한 접전 양상이 지속되었고, 이 틈에서 황대웅과 강호동이 정상권에 올라서고 그 뒤를 남동하, 임종구, 박광덕, 박태일 등이 추격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91년 모래판이 열리기 전만 하더라도 강호동의 기세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영원한 강자가 없다는 스포츠의 진리가 전광석화 같은 들배지기 기술처럼 확인된 1991년 모래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