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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세 Mar 19. 2021

추억의 씨름 (10) - 모래판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다.

1989년 10대 장사의 등장, 그리고 모래판에 불어닥친 변화의 기운


1989년 3월 16대 천하장사 대회에서 '모래판의 황제' 이만기는 결승에서 같은 팀 동료이자 동갑내기 라이벌 고경철을 3-1로 제압하고, 바로 직전 백두급 결승에서의 패배를 설욕함과 동시에 10번째 천하장사에 등극하는 금자탑을 쌓았다.


16번에 걸쳐 펼쳐진 천하장사 대회 중 무려 10회나 정상에 오른 이만기의 업적은 전설에 남을만한 것이었다. 나머지 6번의 천하장사 대회에서는 이준희(3회), 이봉걸(2회), 장지영(1회) 등만이 정상에 올라섰다.


반면에 결승에서 아쉽게 고배를 든 고경철은 이만기라는 거대한 벽이 없었다면 충분히 천하장사를 거머쥐고도 남을 기량의 소유자였다. 백두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기술씨름을 구사하는 고경철은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운한 선수로 기억될만하다.


10번의 천하장사 등극이라는 위업을 이룬 이만기는 대회 직후 인터뷰에서 1989 시즌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처음으로 은퇴를 염두에 둔 발언을 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황제의 동기부여는 서서히 쇠퇴해가고 있음을 알리는 징조였다.


마치 영화 '슈퍼맨 2'에서 사랑하는 연인 로이스 레인(마곳 키더)을 위해 자신의 초능력을 포기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슈퍼맨' 클락 켄트(크리스토퍼 리브)처럼 '모래판의 황제' 이만기도 자신의 천하장사 가운을 벗고 평범한 일상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16대 천하장사 대회 순위표를 보면 8위에 새로운 이름이 눈에 뜨인다. 마산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모래판에 뛰어든 18세의 신예 선수 강호동이었다. 조흥금고에 입단해 프로무대에 데뷔한 강호동은 그 해 5월 일양약품을 전격 이적한다. 그리고 거기서 김학용 감독을 통해 씨름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1989년 7월 부산에서 열린 제44회 전국장사 씨름대회 백두급 경기에서 강호동은 4강에서 자신의 마산상고 선배이자 모래판의 황제로 군림하고 있던 이만기를 2-0으로 제압하는 이변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자신과 조흥금고에서 잠시 한솥밥을 먹은 임용제마저 3-0으로 제압하면서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백두장사에 오르는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만기에 필적할만한 기량을 갖춘 10대 장사의 등장을 반겼고 공교롭게도 이만기의 동향, 고등학교 후배인 강호동을 이만기와 비교하면서 새로운 라이벌 구도의 형성을 부추겼다.



한 번 진 선수를 만나면 두 번 연속 지지 않는다는 이만기의 승부근성과 씨름 성향을 볼 때 재대결에서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주목이 되었다. 2개월 후 1989년 9월 13일에 펼쳐진 17대 천하장사 대회 8강전에서 두 선수는 다시 대결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또다시 강호동은 신경전을 펼치다 제 풀에 지친 이만기를 공략하면서 2-0 완승을 거두게 된다.


치열한 승부를 펼치지만 전통적인 '예'를 상당히 중시하는 스포츠인 씨름에서 강호동은 마치 이단아 같은 모습을 종종 연출했다. 기존 장사들의 포효와는 성격이 다른 '샤라포바급' 괴성에 과격한 제스처, 그리고 종종 심판 판정에 과도할 정도로 항의를 펼치는 모습 등은 넘쳐 오르는 승부근성을 주체하지 못하는 하이틴의 모습이었다. 결국 9월에 펼쳐진 이봉걸과의 백두급 결승에서 강호동은 2-2 상황에서 스스로 모래판을 퇴장하는 볼쌍 사나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 모래판에서의 강호동의 모습은 결코 호감형이 아니었다. 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 예능 프로그램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엔터테이너 강호동의 지금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모래판에서의 강호동이었다. (눈빛부터가 근본적으로 다른 느낌이었다.)



를 보다 못한 소속팀의 김학용 감독이 속된 말로 강호동을 '워워' 시키기 위해 매일마다 정신교육을 시킨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여하튼 182cm 120kg의 우람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유연성과 힘으로 능수능란한 기술을 구사하는 강호동의 존재는 모래판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다시 1989년 17대 천하장사 얘기로 돌아가면, 8강에서 이만기를 제압한 강호동의 기세는 최연소 천하장사 기록까지 수립할 것이 유력해 보일만큼 어마 무시했다. 하지만 강호동도 쉽사리 넘지 못하는 벽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인간 기중기' 이봉걸이었다. 준결승에서 강호동은 이봉걸의 벽을 넘지 못하고 1-2로 무너졌다. 이봉걸의 밀어 치기에 강호동은 유달리 힘을 쓰지 못하였다. 이만기를 상대로는 능수능란하게 기술씨름을 구사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만기, 강호동이 모두 탈락한 가운데 천하장사는 돌아온 '인간 기중기' 이봉걸의 몫이 될 것이 유력해 보였다. 하지만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이다. 또 다른 이변이 기다리고 있었다. 1984년 진주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프로무대에 뛰어든 김칠규는 고등학교 졸업 당시 상당한 기대를 모은 유망주였다. 하지만 프로무대 데뷔 후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한 채 매번 조기 탈락하면서 서서히 존재감이 잊히고 있었다.


그러나 17대 천하장사 대회에서 김칠규는 이종식(일양약품), 황대웅(삼익가구) 등을 연파하며 4강에 올랐고 4강에서 사상 처음으로 준결승에 오른 곽연근(럭키금성)을 제압하고 결승에 진출했다. 체급 장사 대회에서도 단 한 차례도 결승에 오르지 못한 김칠규가 천하장사 대회 결승에 오른 것만으로도 이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봉걸이 워낙 강호인 탓에 과연 김칠규가 한 판이라도 따낼 수 있을지 의문시되는 상황이었다. 예상대로 첫 판을 내준 김칠규는 두 번째 판을 따내면서 이변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양 선수는 나란히 3,4번째 판을 주고받으면서 마지막 승부에 돌입하였다. 워낙 대접전인 탓에 KBS에서 중계하던 방송은 정규시간 관계로 끝을 보여주지 못하고 마감되었고, 필자는 라디오를 통해 이 치열한 승부를 접해야만 했다.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던 승부는 김칠규가 되치기로 이봉걸을 모래판에 눕히면서 대이변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체급 장사에 오르지 못한 선수가 곧바로 천하장사에 등극한 경우는 1984년 3회 대회 장지영 이후 김칠규가 두 번째였다.



커리어로 따지면 김칠규보다 더 화려하기 그지없는 고경철, 황영호, 손상주 같은 대어급 선수들도 해보지 못한 천하장사를 거머쥔 김칠규는 고등학교 졸업 당시로만 따진다면 천하장사에 오르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정상급 기량의 소유자였다. 좀처럼 자신의 재능을 만개하지 못한 김칠규는 1989년 9월 이변이 속출되던 모래판의 모든 소요 상황(?)들을 종결지었다.


이만기의 쇠퇴, 강호동이라는 역대급 신인의 등장,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김칠규의 천하장사 등극 등 1980년대의 마지막 해의 모래판은 그야말로 이변의 회오리로 점철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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