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초에 항암치료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CT 검사를 받은 후 77일의 시간이 흘렀다. 추운 겨울을 지나 어느덧 따뜻한 봄기운이 느껴지고 나뭇가지만 앙상하게 남아있던 산책로는 초록빛 잎으로 치장한 나무들로 빼곡하게 메워졌다.
앞만 보고 달리던 직장생활에 잠시나마 숨 고르는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갑자기 공허해진 사이클에 어떻게 적응하나 고민했지만 어느새 새로 바뀐 일상에 적응하고 있는 나 자신이 보였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흐를까 하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아침식사 후 오전 또는 오후에 나가서 운동하고 집에 돌아와서 씻으면 보통 3시간 이상 지나고 잠시 책을 보거나 인터넷 서핑하고 나면 어느새 저녁시간이 다 되어간다. 생각보다 책을 많이 읽지 못해 아쉬움이 남고 효율적인 시간 관리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된다.
숨 고르는 일상생활에서 나에게 樂이 되었거나 새롭게 시작한 활동들을 나열해보았다.
1. 빈센조
드라마 본방을 잘 챙겨보지 않았는데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 '빈센조'에 2개월이 넘도록 푹 빠져 지냈다. 주연배우인 송중기를 비롯해 다른 조연 배우들도 저마다 개성이 확실한 연기를 선보여서 드라마 보는 재미가 추가되었다. 무엇보다 악의 무리들을 더 악한 방법으로 처단하는 과정이 사이다 한 박스를 흡입하는 것과 같은 시원한 청량감을 주었다.
송중기 배우가 출연한 드라마는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빈센조'를 보면서 송중기 배우가 정말 연기를 잘한다는 생각이 계속 들게 되었다. 장르가 송중기라는 말이 허언이 아닐 만큼 송중기 배우의 연기력은 이탈리아 마피아 그 자체였다.
2. 산책하면서 사진 남기기
서울 시내에 산책할만한 곳이 참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날씨도 따뜻해지니까 다니면서 풍경을 담는 재미도 쏠쏠하다. 꽤 멀어 보였던 장소도 막상 걸어보니 10km도 채 되지 않음을 몸소 체득하였다.
산책로와 둘레길 도장깨기 하는 기분으로 다니다 보면 시간이 순삭 된다.
3. 성경 읽기
무언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나 기원을 드렸던 적은 돌이켜보니 드물었었다. 특정한 이벤트가 있을 때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거나 석가탄신일 때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면서 소원을 빌었던 적은 있는데 평상시에는 무언가를 간절히 기원하기 위한 의식을 행했던 적은 없었다.
작년 12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고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 때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게 되었다. 원래 불교신자였지만 종교에 따로 구분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요즘은 부처님과 하나님께 늘 기원 및 기도를 드린다. 목사님 친구를 통해 선물 받은 성경책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짐을 느낀다.
힘든 일을 통해 종교에 더 진지하게 임하게 된 것은 나의 생활 습관에 긍정적인 시그널을 더욱 많이 안겨줄 것 같아서 감사하게 생각하게 된다.
항암치료를 시작할 때보다 몸이 가벼워진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많이 안정되어 감을 느낀다. 방심하지 말고 초심을 놓지 않고 겸손함과 평정심을 유지하다 보면 어느 순간 좋은 소식이 성큼 다가올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