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안보는 엄마되기
오늘 하원 후 놀이터에서 놀다가 생긴 일화이다.
이로가 놀이터에서 꼭 타고 싶었던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그네이고 하나는 고무 밴드로 되어있는
커다란 시소처럼 생긴 점프를 할 수 있는 기구에서 점프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두 개는 아이들에게 늘 인기가 많은 것이라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오늘따라 두 개 다 쉽게 자리가 나지 않아 이로와 나는 지붕 오르기나 미끄럼을 타면서 언제 자리가 나오나 하며 눈은 그네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드디어 그네가 비었다.
“정이로 출동!” 하고 나는 외쳤고 나와 이로는 작전이라도 하듯 잽싸게 뛰어가 그네를 차지했다.
이로가 막 그네에 앉아 다리를 휘젓고 있을 때쯤
한 아이가 곁으로 와서 “나도 타고 싶은데…”라고 말한다. 곧이어 그 아이의 아빠도 곁으로 다가온다.
아이의 아빠는 그네를 탄 이로를 정면으로 마주 보며 있었고 아이는 옆에서 이로를 애절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아 물론, “나도 그네 타고 싶어…”라고 말하면서.
이로는 꿋꿋하게 다리를 폈다 오므리며 자신이 탄 그네에 가속도를 붙이고 있었다.
(엄마만) 부담스러운 이 상황에 나는 잠시 양보라는 망설임을 고민 하기도 했지만,
이로도 오랫동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가 방금 막 탄 상황이니 적당히 타고 양보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물론 이로도 그럴 마음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내가 마음속으로 양보에 대한 내적 갈등을 하는 동안 옆에 그 아이는 다른 놀이기구를 타기로 마음먹었는지 자리를 옮겼다.
눈치 없는 자가 승리한 것이다.
나는 속으로 킥킥 거리며 꼬맹이들 사이의 승패를 상상했다.
이로가 어렸을 때 나는 아이에게 종종 먼저 양보를 권했다.
“같이 놀아, 이거 친구도 가지고 놀게 해주자.”
“다른 친구도 하고 싶은 것 같아 그러니까 이로는 다른 거 하고 놀까?”
“다른 친구 기다리니까 서둘러 줄래”라는 말들을 쉽게 내뱉었다.
내가 아이들의 세상에 개입할수록 아이들의 세상의 규칙들이 무너져 버렸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말로 소통하지 못하는 영유아 아이들에게도 그들만의 놀이 규칙은 존재한다.
뺏고 뺏기는 것만 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그렇게 하나씩 배워 나가는 중이었다.
나는 그때 양보라는 사회적 미덕을 가르치겠다고 아이가 스스로 세상의 규칙을 배울 수 있었던 기회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ISFP 나는 타인의 감정을 잘 눈치채는 능력이 있는데, 한국인에게 이 능력이 특화된다는 것은
눈치를 잘 보는 삶이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아, 왜 나만 이렇게 빨리 눈치를 채는 것인가?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을 때 불편한 건 오로지 나 하나뿐인 듯한, 부끄러운 것은 다 내 몫인 듯한 이런 감정… (너무 싫다.)
상대의 감정을 빠르게 읽고 상대가 필요한 것을 제시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분명한 센스이다.
하지만 주체자가 내가 아닌 상대가 되고 상대에게 맞춰지는 삶이 주가 된다.
이러한 삶은 배려와 눈치보기를 수반해야만 하는 숙명도 뒤따른다. 그러하니 사회 속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에 피로감을 느낄 때가 많다.
한국인들에게는 낯선 서양 사람들의 세계관에는
“눈치 안 보는” 것이 있는데,
이 성향들은 다양한 태도들에서 관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마트에서 계산을 하려고 할 때,
한국인이라면 캐셔가 물건을 다 계산하기도 전부터 계산하려고 카드를 손에 쥐고 있겠지만
많은 서양인들은 자신의 물건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의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다 담고 가방도 여민 후에서야 또 천천히 가방에서 주섬주섬 지갑을 찾아 결제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 물론 친분이 있는 캐셔와 안부 인사와 근황 얘기도 빠짐없이 나눈다.
또 하나, 거리에서, 해변에서 어떤 몸을 가졌던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해변에서는 날씬하지 않은 여자들이 비키니를 입고 있거나 배가 잔뜩 나온 아저씨들이 삼각 수영복을 입고 있는 모습들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
한국이었다면 앞 뒤 옆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돌비 서라운드 채널을 만들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것은 비키니를 입은 사람이 눈치를 보지 않아 생긴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입고 싶지만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입지 못한 서러움에서 시작된 시기와 질투의 결과물이 타인에 대한 간섭의 눈초리와 말이 된다.
각자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산다면
어찌 쉽게 타인에게 이거 해라. 이건 왜 안 하니. 같은 섣부른 간섭을 할 수 있을까.
눈치를 안 본다는 것의 의미는 내 멋대로 하겠다 라는 의미는 아니다.
공중질서나 도덕을 부정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은 나의 주관을 굳건히 지켜내고 있다는 의미이며,
내가 누구이든, 무엇을 하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 사회생활 좀 하려면 눈치는 챙겨야 한다.
상사, 동료, 학급 친구 같은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는 눈치를 본다.
정시 퇴근도, 나만의 취향을 갖는 것도, 단체행사에 불참할 권리도 우리는 모두 비공식적으로 거부당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생각해보면 빨리빨리 한국인들이 재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 급한 성격 덕분 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사실은 우리는 눈치를 보기 때문에 빠르게 처리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 누구라도 수틀리면 주변 사람들의 날 선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야 하므로 그 시선의 대상이 내가 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빠르고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모두 같은 속도를 가질 수 없다.
몸의 크기도 다르지만 마음의 크기도 다르니 한결같은 속도를 내어 세상을 돌릴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는 느리고 또 누군가는 많이 기다려야 하고 또 누군가는 애타기도 하겠지만
각자가 가진 속도를 존중해 줄 수 있는 조금의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눈치 없는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여러모로 놀이터에서 배우는 것이 많다.
그나저나… 내일은 놀이터 쉴 수 있을까…?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