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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niciel Apr 14. 2021

34. 퀴논 거리

정말 베트남과 닮았을까?

정리하는 것은 귀찮다. 이삿짐을 챙길 때는 급했지만 이사 뒤에 정리하는 일은 급하지 않으니 이삿짐을 대충 풀어놓고 우선 잠을 잘 수 있을 자리를 간단하게 만들었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이기는 했지만 방 하나에 모두 놓으려니 수납공간도 마땅치 않고 물건이 많아 보였다. 그래도 주말 사이에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구획을 나누어 놓고 고양이가 놀 수 있게 정리를 해두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문 밖으로 나섰다. 새로운 동네에 오게 되면 의례적으로 하는, 동네 탐색을 시작했다. 골목길 위로 올라와보니 퀴논 거리가 나왔고, 작은 계단길을 쭉 올라가면 녹사평역 부근의 상권이 나왔다.


나는 집 바로 근처에 퀴논 거리가 있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항상 이태원에 놀러 올 때면 이태원역 3번 출구나 4번 출구로 나와서 길을 따라 쭉 내려와 일상적으로 들르던 거리였는데 이제는 이곳이 나의 생활 반경이 된 것이다. 


그때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생활의 터전이 되니까 눈에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퀴논 거리라는 이름답게 베트남식 카페도 있었고 동남아 음식점이 몇 개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시안 음식점이 아주 많거나 하지는 않았다. 


굳이 아시안 음식점을 찾아보자면 유명하다고 하는 딤섬집이 하나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 거리에는 굉장히 다양한 국적의 음식점이 있었다. 프랑스 가정식을 하는 음식점도 있었고 삼겹살 등등 이렇다 할 국적의 음식점들이 몰려있는 곳은 아니었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내가 좋아하던 남아공식 스테이크 집이 나왔다. 


특이했던 것은 그라피티가 이곳저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조금 걷다 보면 오색빛깔의 등불도 거리에 달려 있었다. 베트남에 가본 적이 없어서 베트남의 퀴논 거리를 컨셉으로 조성되었다는 이 거리가 정말로 그와 닮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길을 걸어 다니면서 예전에 친구들과 방문했던 가게들도 보았고 지름길도 익혀 놓았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어디로 가야 버스를 탈 수 있는지 등등을 파악했다. 


나의 고양이 딸은 3일이 걸려 새로운 집에 적응하는 단계를 거쳤다. 첫째 날은 구석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고 둘째 날은 나와서 밥을 먹고 셋째 날은 완전히 나와서 내가 있을 때는 내 옆자리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자리를 비우면 구석에 혼자 들어가서 숨어있었다. 혼자서 편하게 쉬는 것과는 다르게 어딘가 무섭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뒤로도 한동안은 내가 집을 비우는 시간 동안은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주말이 지나고 나서 회사에 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는데 일주일 정도 지나서야 완전히 새로운 공간에 적응하는 듯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지만 자신의 영역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양이들에게 이사는 큰 일이다. 고양이까지 적응을 끝내고 나자 내가 드디어 이사를 무사히 잘 끝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서울로 올라와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으로, 나 혼자만의 힘으로 집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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