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울> 후기
새 힘으로 멀리 가보려던 새해 첫 마음이 무색하게 최근 몇 주간 기운이 없었다. 마음 붙일 데가 없다는 생각도 종종 들었다. 지난 몇 번의 주말 동안 나를 은용, 하고 부르는 친구들이 잘 먹여주고 이야기를 들어줄 때 시간이 앞으로 더 나아가지 않았으면 했다. 은용도 나이고 우주도 나인데 우주, 라고 불릴 때마다 갑갑한 마음이 들었다.
은용과 우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중에 <소울>을 봤다. 중간께부터 어찌할 도리가 없을 만큼 눈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나는 뭔가를 이루려고 사는 것이 아니구나. 이루려고 사는 것이 아니야. 뭔가를 이루어내야 할 것 같고, 계속 나의 쓸모를 입증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들도 뱅글뱅글 돌기를 멈췄다. 몸을 가진 존재로 느끼고 살아있는 상태가 생의 전부라는 것, 삶에 목적과 의미를 갖춰두는 대신 지나가는 지금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한기처럼 밀려들었다. ‘살아있음’에 목적이 있다면 그저 ‘지금을 살아있음’ 뿐이다. 자주 까먹는 것이지만.
은용은 노는 걸 좋아하고 게으름도 부리는데 우주는 부지런하고 늘 뭔가를 성취한다. 차분하고 수줍은 은용과 달리 조금 더 외향적이고 용기 있는 우주. 우주는 밥벌이와는 멀리 떨어진,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담은 부캐였는데, 일의 영역으로 흘러오면서 일과 일 밖의 삶이 자꾸 하나가 됐다. 우주로 살며 알게 된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동안 나를 은용, 하고 부르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다. 나조차도 나를 은용보다는 우주로 소개했다. 하루 중 은용, 하고 불릴 때가 아예 없는 날이 점점 늘어나면서 나는 계속 뭔가를 성취하고 증명해내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했던 것 같다. 이루지 않으면 안 되고, 쓸모 있음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영화가 끝나고, 내가 돌연 죽을 예정이고 죽기 직전에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일, 그리고 파도에 발을 담그고 그림자와 윤슬을 쳐다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소울>이 나에게 영감을 준 것처럼 누군가에게 스파클을 만들어주고 싶다. 0에서 1로 마음으로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창조의 영역에 목마름이 있는 것 같다. 디즈니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지킬과 하이드 박사 같지만 우주와 거리를 좀 벌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주는 은용의 생일 주간이니까 당분간은 우주가 상징하는 것들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다. 살아있음 그 자체로 온전해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