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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oozoo Oct 09. 2020

서로가 서로의 조각을

성립 개인전 <흩어진 파-편들> 후기

(2020년 6월)


내가 좋아하는 라이즈 호텔 지하에서 신기한 전시가 열렸다. '심야' 타이틀을 달고 있던 성립 작가의 개인전. 낮과 밤에 각각 다른 작업이 전시된다고 했다. 밤 아홉 시가 다 되어갈 때 입장.


'파편을 만나기 위해서' ⓒ 우주 OOZOO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두 면을 빼곡히 채운 드로잉을 만난다. 모서리에서 양쪽 벽으로 그림이 펼쳐져 있다. 한 사람이 그린 것이기에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조금은 달라 보이기도 했다.

나중에 성립 작가가 직접 도슨트 투어를 할 때, 과거의 작업물이 가장 안쪽 모서리에 배치되어 있어 과거에서부터 번져나가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듣고 보니 그림이 미묘하게 달랐던 이유가 보였다.



그림을 걸어두는 방식도 독특 ⓒ 우주 OOZOO


종이 위의 그림뿐만 아니라 천이나 아크릴, 책상을 이용해 설치된 작품도 있었다. 영상으로 움직이는 드로잉을 만나기도 했고. 그래서 드로잉이라는 것을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작품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사람들이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느낌도 특이했다. 작품 속 사람의 발에 달려있는 그림자는 한 방향으로만 있었다. 모두 다른 포즈이고, 또 다른 방향으로 서있지만 계속 보다 보면 비슷한 선 위에 서있는 것 같다. 작가님은 사람이 나무처럼 보였다고 했다. 처음에 혼자 봤을 때는 몰랐는데, 역시 도슨트를 듣고 나니 의미를 덧붙여 볼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사람 숲 ⓒ 우주 OOZOO


이 날 전시장을 두 번 반 돌았다. 크지 않았지만, 한 시간을 넘게 서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리듬감이 느껴졌다. 조여졌다가 느슨해지기도 하고, 강렬했다가 다시 차분해지기도 했다. 심야 전시라서 그런지 전시장도 '밤'의 느낌이었다. 빛의 명암이 느껴졌다.


작가님과 잠시 서서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살짝 여쭤보니 이 전시의 모든 것을 기획했다고 하셨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신경 썼다고. 심지어는 낮과 밤의 전시물이 다르고, 조도도 다르다고 했다. 전시 기간 동안 낮 전시도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도저히 맞지 않아 보지 못해 너무 아쉬웠다.


작가님을 꼭 만나고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바로 이 글 때문이었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구나'. 이 문장 하나가 마음에 탁 닿았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구나' ⓒ 우주 OOZOO


5 , 혼자서 3 동안 제주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그때는 '  살기'라는 개념도 없었던 때였다. 스텝으로 내려와 사는 사람이 아니면 나처럼 장기로 머무르는 사람이 없어, 이야기를 나누게  사람마다  하필이면 제주에서 3주씩이머무르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조금 힘들었다. 마무리 짓지 못한 마음이 있었고, 2년 동안 매달려왔던 일의 마침표를 찍으니 내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른 채 막연하게 '혼자'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게 하필이면 제주였다. 서울에서는 멀고, 조금이나마 마음 붙일 곳이 있는 제주.


제주에 내려가 사는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날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3시간 넘게 걸어간 날이었다. 러프하지만 계획이라는 걸 조금은 세우는 내가, 아무 계획도 없이 지도도 보지 않고 바다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억새를 만나면 쓰다듬고, 차가 지나가면 조금 멈추고, 그림자를 보며 걸었다. 그때 생각이 후루룩 지나갔다.

아, 관광지를 가지 않는 것도 여행이구나. 남들과 다른 식으로 여행하는 것도 내 나름의 여행이구나. 내가 만들어가는 여행처럼 내 삶도 그렇게 살면 되겠구나. 나를 돕거나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나인 거구나.


이 글을 보니 그때의 마음이 생각나 한참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운좋게도 전시장에서 작가님을 만나 대뜸 물었다. 요즘 마음은 어떠시냐고. 작가님은 전시를 열고 번아웃이 와서 잠을 많이 잔다고 했다. 5개월 동안 작업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전시를 봐주어 좋다고 했다. 나는 구원에 대해 똑같이 말하는 사람을 만나 놀라고 좋았다고 얘기했다. (지금 이 글을 쓰며 요즘은 어떤 마음일지 또 궁금해졌다.)



작가의 테이블 ⓒ 우주 OOZOO


전시장 한 켠에는 작업 테이블이 있었다. 그동안 작업했던 드로잉, 책, 습작, 메모와 일기가 있었다. 성립 작가는 과거의 기록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예전에 했던 것들을 다시 보면 생경하다고 했는데, 오래전 내가 썼던 글을 볼 때 느껴지는 감각이 생각났다. 이게 정말 내가 한 건가, 싶은 그런 느낌.


전시장을 떠나기 전, 하염없이 걸어가는 드로잉을 만났다. 걸어갈 때마다 서서히 주변 풍경이 달라졌다. 별이 촘촘하게 있던 밤, 걷는 사람은 숲을 만난다. 그리고 다시 밤, 다시 숲. 계속 걸어가는 사람을 보며 또 한 번 제주를 떠올렸다. 하릴없이 걷고,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고, 게스트하우스 거실에서 낯선 사람과 만나 하룻밤 이야기를 나누고, 볕을 쬐던 날들.



걸어가는 드로잉 ⓒ 우주 OOZOO


입장할 때 받았던 엽서에도, 전시 제목에도 '파편'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작가님은 '저는 하나의 조각으로서 나와 같은 곳에서 흩어진 파편들을 만나기 위해 이 전시를 열었다'고 썼다. 내가 이곳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언젠가 내가 했던 생각을 만난 것은 다 파편을 만나는 일이었구나. 작가님에게서 나의 파편을, 나에게서 작가님의 파편을 만난다는 건 서로가 서로의 조각을 갖고 있다는 의미구나. 이렇게 서로 연결되는 것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나니까, 계속해서 나와 함께 걸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삶을 여행처럼 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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