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일공공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 oozoo Oct 02. 2020

할아버지의 다이어리

100일 쓰기 #2

할아버지의 책상을 들여다보다가 깨달았다. 평생에 걸쳐 다이어리를, 일기를, 메모를 하는 할아버지. 나의 기록 습관은 할아버지에게서 온 것이구나.

할아버지는 인터넷으로 검색도 하고, TV 프로그램의 방송 클립도 보실 줄 알지만 여전히 손으로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책상 한 켠 이면지에는 좋아하는 프로그램의 재방송 시간, 즐겨보시는 배구의 포지션별 특징, 선수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KTX 시간표까지 꼼꼼하게 기록된다.

매년 해가 바뀔 때마다 꼭 구비하는 것은 양장 다이어리. 평생 적어둔 다이어리가 책장에 주르륵 꽂혀있다.

늘 무언가를 쓰신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도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오늘은 대체 어떤 것들이 담겨있는지 궁금해져서 몰래 다이어리를 펼쳐봤다.

맨 첫 장에는 가족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힌 메모지가 붙어있었다. 이어서 병원 약속, 점심 메뉴와 가격, 간단한 가계부에 더해 전화한 사람도 적혀있었다. 올해에는 코로나 19 때문에 많이 걱정되셨는지, 영국에 있는 삼촌과 통화한 어느 날에는 '코로나 19 전염병 -> 안전'이라는 문구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할아버지의 다이어리 / 우주 OOZOO


다이어리를 넘겨보다가 마음에 탁 걸렸던 부분은 집에 들렀다가 간 사람의 이름이었다. 군대 가기 전 한 달 남짓, 할아버지네에 자주 들렀던 사촌 동생의 이름이 가장 많았다. 올봄에 독립해 나온 나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오늘 유난히 반가워하시던 표정이 떠올랐다. 몇 년만 지나면 구순이 되시는 우리 할아버지, 가까이 살 때 조금 더 자주 만나러 갈걸.

할아버지의 다이어리에 내 이름이 조금 더 많이 등장했으면 좋겠다. 즐겁게 기록하실 수 있도록 포스트잇도 사다 드려야지. 할아버지가 오래오래 메모하시기를 바라며.

매거진의 이전글 할머니의 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