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한 방울이 그래

by 믈름

얼마 전 늦은 가을비가 왔다.

사실 가을이라기에는 벌써 12월이 다 되었고 날씨도 무척이나 추워서 하나둘 패딩을 꺼내 입었지만, 아직까지는 너무 일찍 져버린 단풍을 기리고 싶은 게 본심이다. 겨울비보다 가을비의 어감이 더 따뜻하기도 하고.


내 침대는 창문 바로 앞에 있다. 겨울에는 문틈 사이로 외풍이 들어오고, 여름에는 모기가 방문하기 최적의 조건이다.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이 가까워서 술에 취한 주정뱅이들의 고성방가가 들리질 않나, 야시장이 열릴 때면 소란과 불빛 때문에 오징어잡이 배라도 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이 자리가 좋다.

아침 햇빛이 가장 먼저 스며들고, 저녁 노을이 가장 느리게 사라지는 자리라서.


거의 유일하다 싶은 장점은 잠들기 직전 추적추적 들려오는 빗소리다. 10층이라는 높이 덕분에 빗방울이 땅에 닿는 소리가 아닌 쏟아지는 도중의 소리가 들린다. 그게 얼마나 시원한지, 주의 깊게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은 분명 모른다.


비가 오는 한밤중에는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조용하지만 조용하지 않은 세계에서, 따뜻하고 푹신한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워 있노라면 세상에는 나 하나뿐인 것 같다. 침대를 타고 파문이 퍼지는 밤하늘 호수를 흘러가는 것이다. 잔잔하게 물결치는 수면에는 별과 달이 무수히 비치고, 고민할 것도 생각할 것도 없는 그런 따뜻한 밤이 찾아온다.


여름비는 속이 뻥 뚫리는 것 같다. 천둥 번개가 치고 물줄기도 세서 시원하게 느껴진다. 가을비는 차분하지만 서늘하기도 해서 살짝 외롭다. 겨울비는 음, 비보다는 눈이지.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소리는 또 그 나름대로 좋지만 이건 다음에 할 이야기다. 그래. 겨울비는 다음을 기다리게 된다. 아예 봄이든, 눈이 쌓인 다음 날이든. 그리고 봄비는 엷다. 새싹처럼 부드러운 소리가 난다. 그렇게 빗소리가 들려오고서야 비로소 나는 계절과 시간의 흐름을 실감할 수 있게 된다.


비 오는 날을 제법 좋아한다. 아마 해가 쨍쨍 내리쬐는 맑은 날 이상으로. 비가 오면 모든 것이 부옇게 번져서 조금 더 아름답게 보이는 탓이다. 도로가 축축하게 젖어 들고 패인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기면, 그 하나하나에 서로 다른 세계가 비친다. 이쪽에는 퇴근하는 직장인의 고단하고 뿌듯한 얼굴이, 저쪽에는 오늘따라 일이 잘 안 풀린 학생이 서러운 얼굴이, 그리고 또 다른 쪽에는 우산 한 개로 폭우를 헤쳐 나가는 연인의 즐거운 얼굴이 비친다.


얼핏얼핏 엿보이는 세계는 정말이지 넓고 다양해서 마치 나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착각마저 든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면 미끄러지지 않는 데 온갖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데, 그 덕분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좋다. 그냥 걷기만 해도 되는 날이라서 그게 좋다. 주야장천 쏟아지는 굵은 물줄기는 두꺼운 암막 커튼처럼 나를 숨겨줄 것만 같다. 소음도 불빛도 모두 가려져서 나밖에 없는 세계가, 어쩌면 나마저도 없을 그 세계가 그립고 그리워서 눈물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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