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십만 원씩 기부한 것도 벌써 삼 년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수입이 생기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시작했다. 그리 큰돈은 아니지만, 이렇게 보여도 기간제근로자의 코딱지만 한 월급에서는 제법 노력한 액수다. 일 년에 네 번 이상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나의 꾸준한 목표였다. 종류에 구애되지 않고, 독거노인 말벗부터 시작해 시각장애인과 함께 책 읽기, 바다 쓰레기 청소, 연탄 나르기, 모자나 양말 뜨기, 유기견과 함께 산책하기, 헌혈 등 다양했다.
어쩌면 나는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최소한 좋은 사람이고자 노력한다고, 자부심은 없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또는 그래서 매일 같이 되새기고 싶어진다. 나는 옳다고. 내가 옳다고.
얼마 전 직장 동료들과 함께 샌드위치를 시켜 먹었다. 대다수 이야기의 도입부가 그러하듯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주문이 밀려들어 바빴던 걸까. 작업이 익숙하지 않은 신입 직원이 하필이면 우리의 주문을 담당했던 걸까. 뭐, 직장인의 귀중한 점심시간을 빼앗겠다는 간악한 계략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의 샌드위치 중 하나가 잘못 도착해 버린 것이다.
지정된 점심시간은 딱 한 시간. 다소의 융통성은 존재하지만, 우리와 같은 기간제근로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자연히 식사 메뉴가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이래저래 여의치 못하다. 아마 그래서일까. 바른말 하기로 유명했던 나의 직장 동료가 그토록 분노했던 이유는. 평소에도 불의를 보면 못 참고 문제 제기를 머뭇거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상급자라도, 할 말은 해야 하는 그런 똑 부러지는 사람.
우리가 샌드위치를 먹는 사이, 동료는 전화를 붙들고 한참을 싸웠다. 얼핏 들린 말은 ‘이런 식으로 해서 장사가 되나요?’. 기어코 전액을 환불받고 새 샌드위치를 보내주기로 했다며 의기양양하게, 그러나 여전히 화가 난 채로 돌아온 그 사람의 곁에서 나머지는 박수를 쳤다. 마치 그의 무고함을 증명해 주려는 듯, 당연한 보상이라고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글쎄, 정말 당당하다면 그런 칭찬 따위는 서로가 필요 없지 않았을까.
그래서 불현듯 생각하고 만다. 나의 동료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고, 그 직원은 샌드위치 하나 어치만큼의 손해를 보았다. 일차적인 원인은 당연히 실수한 샌드위치 가게 직원에게 있고, 사실은 받아 마땅한 대가라고도 인식한다. 그러나 결국, 당신의 분노는 여전하지 않은가.
고작 공짜 샌드위치 두 개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잘못 도착한 샌드위치에 분노하는 일련의 사고방식이 사실 나는 조금 부럽기까지 하다. 그 직원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겠지. 더없이 미숙하고 실수가 잦은 나는, 언젠가 실수한 직원의 위치에 있을 것 같아서 겁이 먼저 난다. 누가 들으면 기겁하기 딱 좋은 패배주의적 사고방식이지만, 나는 내가 언제까지고 결백할 것 같지가 않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 죄가 없이 무고하다고.
되돌아보면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는 꼭 어떠한 확신이 함께했다. 대판 싸우고 헤어진 친구가 그랬고, 발표하거나 의견을 낼 때도 늘 그랬다. 조금만 더 양보했다면, 조금만 더 고민했다면, 조금만 더 나를 의심했다면. 그러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렇게 부족한 머리로 되새기면 깨닫는 것은 하나뿐이다.
결국 나와 너의 경계는 대다수 흐리다. 나만의 문제인 줄 알았던 것이 너의 문제이기도 하고, 너만의 성과인 줄 알았던 것이 나의 성과이기도 하다. 내게 옳은 일은 네게 틀리고, 네게 옳은 일은 내게 틀리다. 모든 일은 무 자르듯 잘라낼 수 없고, 칼같이 재서 기어코 나의 결백을 입증하고 나면. 그래도 나에게 남는 것은 영영 없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생애 단 하나의 욕심을 꼽자면 이것이다. 지금처럼 비관적이지 않았을 즈음에는 옳은 사람이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고개를 든다.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틀린’ 샌드위치를 받았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