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신문을 사러 나갔다 들어오는 길에 지나가던 할머니가 말을 거셨다. 지금 앞이 잘 안 보이는데, 혹시 안개가 꼈냐고 물으셨다. 할머니가 바라보시는 쪽을 보니 안개는커녕 100미터 앞도 잘 보였다. 아뇨.. 안개는 없어요. 말씀드리니 눈 때문이구나, 하며 갈 길을 마저 가셨다. 집에 오는 길에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금방 잊어버리고 쓰다 만 자기소개서를 들춰보고 또 서류 넣을 곳이 있나 뒤져봤다. 아. 인턴 구해야 하는데.
타인의 늙음, 타인의 장애, 타인의 가난. 나에게 닥쳐도 외면하고만 싶은 걸 모르는 행인의 일이라면 오죽하겠느냐고.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2016년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다. 보고 펑펑 울게 될 걸 직감해서 지금까지 보지 않았다. 주인공인 다니엘은 성실하게 목수 일을 하다 아내의 병간호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다. 아내의 죽음 후 심장병을 얻은 그는 의사로부터 일할 수 없다는 소견서를 받지만, 불성실한 인터뷰 태도로 인해 질병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 자칭 ‘인터넷 난독증’인 다니엘에게 항고를 포함한 모든 절차를 인터넷으로 하는 것을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무실에 몇 번을 찾아가도 돌아오는 대답은 기다리세요, 인터넷으로 신청하세요 와 같은 무력한 소리들 뿐. 영화 러닝타임 절반 내내 그는 보조금을 받기 위해 지겹도록 사무실에 쫓아다닌다. 그러던 중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케이티를 만나게 된다. 비슷한 처지인 둘은 연대를 통해 끈끈해진다. 하지만 그녀의 사정은 다니엘보다 더 좋지 않다. 청소 일을 하고자 구직을 해도 쉽지 않고, 아이 둘 밥 한 끼 해먹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돈이 부족해진다. 이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여성에겐 빌어먹을 선택지가 하나 더 있다. 아니 이걸 선택지라고 해야 맞을까. 그녀는 몇 시간 만에 300파운드를 벌 수 있는 일로 떠밀린다.
과장이 아니다. 부자 나라 영국의 현실이다. 내가 고작 3일 머물렀던 영국의 인상은 높은 고층빌딩들과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로 남았다. 공부 열심히 해서 이런 곳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유치한 생각마저 들게 했다. 하지만 화려한 영국의 이면은 암담하다. 지난 1월 한 달간 영국에서 식량 불안을 경험한 영국인은 전체 성인 중 8.8%에 이른다. 10명 중 1명은 다니엘과 케이티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영국은 대처리즘 이후 90년대에 와서는 비용 문제로 인해 복지를 대폭 축소했다. 대신 영화에서도 그렇듯 노동을 유인하기 위한 정책을 많이 도입했다. 하지만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노동 유인이 무슨 소용이며,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 난독증’인 다니엘과 같은 사람이 유럽 사회의 고질적인 레드테이프를 헤쳐나가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디지털은 어떻게 보면 새로운 언어이다. 그런 사회에서 디지털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어쩌면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을 사는 것과 같다. 다니엘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가 프랑스에 있을 때 단지 택배 하나를 되찾기 위해 3일을 쩔쩔매며 온갖 곳에 이메일을 쓰고, 프랑스인 친구에게 부탁해 몇 통의 전화를 돌렸다. 그제야 겨우겨우 받을 수 있던 게 내 택배인데, 내 돈도 아닌 정부 돈을 받겠다고 그 망할 행정에 뛰어드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아득하다. 안 받고 말지. 하지만 안 받으면 당장 내일 전기가 끊긴다면? 내일 당장 먹을 음식도 없다면? 이제부턴 생존의 문제가 된다. ‘디지털 시대에 컴퓨터를 못 하시면 안 되죠. 다음 주 토요일에 cv작성 워크숍이 있으니 그거 기다리세요.’ 하는 사이 또 몇 명이 죽는다.
만듦새를 떠나 켄 로치의 영화가 정치적이라서 싫다는 사람들이 많다. 글쎄 내 생각엔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모든 영화는 조금이든 지나치게든 정치적이다. 있는 사회 문제를 다루고, 경각심을 일으켜서, 또 내가 이런 글을 인터넷상에 끄적이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정치적인 단면이라면 더 정치적일수록 좋은 게 아닌가. 올림픽에서도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독도는 우리땅 소리를 못 한다는데, 스크린에서도 정치적이지 못한다면 정치는 국회에서만 해야 하나.
마지막에 다니엘을 변호해주기 위해 상담하던 변호사가 휠체어를 타고 있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나라의 미디어에서 장애인은 너무 쉽게 지워진다. 아예 찾아보기도 어려운데, 어쩌다 찾기라도 하면 비장애인 배우가 장애인 역할을 연기하기 부지기수다. (주로 극적인 효과를 위해 장애인 역할의 배우가 등장한다.) 이 영화처럼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지 않고, 단지 많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더 나아질 수 있다.
할머니의 푸념을 뒤로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하루종일 자소서를 다듬었다. 좋은 직업을 구하려고 노력한다. 뭘 위해서? 구역질이 나올 만큼 하얀 방에 앉아 다니엘의 질병 보조금 항소를 손가락 까딱 하나로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는 아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것도 소명이라면 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