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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효원 Mar 20. 2020

겨울이 지나듯 끝나면 좋겠어

<퍼펙트 월드>(클린트 이스트우드, 1994)

1994년 겨울, 형과 함께 의정부에 처음 갔을 때 우연히 극장을 지나쳤다. 극장이 없는 시골에서 매주 비디오만 빌려 보던 나는, 괜히 그러고 싶은 마음에, 무슨 영화를 하는지도 모르고 극장에 들어갔다. 두 시간 반 이후 소년은 얼굴에 눈물이 범벅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그때 본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퍼펙트 월드>. 그 후 고등학교 3년 동안 매주 극장에 갔다.


할로윈 저녁, 다른 아이들은 유령 분장을 하고 사탕 받으러 다니는데, 필립은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한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인 그의 어머니는 그런 불경한(?) 짓을 용납하지 않는다. 다음 새벽, 두 명의 탈옥수가 집에 들이닥치고, 그중 하나인 버치(케빈 코스트너)는 필립을 납치한다. 탈옥수, 아이, 그리고 경찰 레드(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끝을 알 수 없는 여행을 떠난다.


세 남자의 목적지는 뚜렷하다. 버치는 낯선 땅 알래스카, 필립은 자신이 살던 집, 레드는 이들이 향하는 곳이면 어디든. 이들의 목적지는 셋이지만 마음의 목적지는 하나이다. 퍼펙트 월드, 완전한 세상.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 어디(혹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버치와 필립의 표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완전한 세상에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얼굴을 행복이 피어날 테니까.


버치와 필립은 길 위에서 행복하다. 버치의 목적지는 한참 멀었고, 필립의 목적지는 점점 멀어지지만, 그들은 웃고 떠든다.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필립은 훈육을 잘 받은 동시에, 감정(욕망)을 잘 통제당한 아이이다. 롤러코스터도 타고 싶고, 솜사탕도 먹고 싶지만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버치는 그에게 자유를 선물하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버치는 필립에게 좋은 어른이지만, 정작 자신에게 좋은 아버지는 없다. 폭력을 일삼고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몬 아버지는 차라리 없는 게 나았다. 하지만 버치는 그런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낯선 땅에서 온  엽서 한 장 들고 끝을 알 수 없는 여행을 떠난다. 만약 그의 여행이 성공해 아버지를 만난다면, 그래서 아버지와 마음이 통한다면, 그는 경험해 보지 못한 완전한 세상을 만날지도.


서로 통하지 않을 때, 폭력이 고개를 든다. 힘의 균형이 맞지 않는 가정폭력이 이 작품의 주된 화두이다. 버치와 필립은 여행 중에 부모가 자식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인다. 폭력은 너와 내가 같지 않다는 걸, 소통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행위. 어린아이, 약한 사람을 때리는 건 손쉬운 만큼, 최악의 인간이 되는, 지옥의 문을 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폭력의 대물림은 심각하다. 버치는 어려서 총을 만지고 살만큼 폭력에 노출돼 있었다. 버치가 농장 가족에게 폭력을 가할 때, 필립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소년은 자신에게 아버지 같았던 그의 몸에 박혀있는 폭력성을 보고, 급기야 방아쇠를 당긴다. 그의 나이 8살, 버치가 처음 총을 쏴 사람을 죽인 나이다. 끝나야 할 것은 끝나야 한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듯 끝나지 않는다.      


세상에 이상한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내 인생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은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 퍼펙트 월드는 그냥 오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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