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갓 넘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봤을 때, 참을 수 없었다. 인물, 내용은 사라지고 오로지 남은 기억은 야. 하. 다. 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는 주인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부도덕함(?)’이 미웠지만, 어쩌면 ‘자유분방함’이 부러웠는지도. ‘일당백’에서 5회나 방송하고, 정박님의 상기된 목소리를 들었을 때, 다시 보고 싶었다. 20년 지난 지금, 나는 달라졌을까?
“범죄적 정치 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며 이 길을 용감하게 지켜왔다.”(본문)
외과의사 토마스는 쿨한 남자, 관심은 수술대 위의 환자와 침대 위의 여자뿐.(침대 아닌 곳에서도) 하지만, 귀 있는 자 들어라, 자유를 위한 민중의 함성과 이를 막는 탱크 소리를 듣는다. 눈 있는 자 보아라, 총에 맞아 피 흘리고,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을 본다.(‘프라하의 봄’과 소련 침공) 가장 숭고한 가치를 말하며 가장 추악한 폭력을 행하는 자들을, 그는 몸으로 거부한다.
공산주의 이념(이상)은 사람을 무겁게 짓누른다. 자신은 너무 고상해, 일개 목숨에 불과한 너의 죽음은 마땅하며, 어쩔 수 없다는 거짓말. 천사의 말을 하면서, 사람들을 지옥으로 내밀고, 악마의 축배를 드는 위선자들. 이는 종교, 애국심, 자본주의 등 모두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숭고하다 주장하며, 인간을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만든다. 가벼워진 존재는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
인간의 삶은 단 한 번이기에 가치 있다. 지나간 일들은 다시 되돌릴 수 없기에, 잘했다 잘못했다 판단할 수 없다. 나 자신도 평가할 수 없는 소중한 삶인데, 누가 와서 왈가왈부하랴. 종교와 애국심이 의미 없다는 게 아니다. 다만 내가 고민하고, 회의하고, 선택한 게 아니라면 가짜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의무감에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인생만큼 위태로운 게 없다.
관념의 무게를 벗어던져, 인간 존재의 무게를 얻는다. 직업과 명성을 잃지만, 자신의 삶을 찾아간다. 인생의 전환점에 선 내게 그는 가볍게 살 것을 권한다. 덕분에 만남도, 이별도 좀 쉬워졌다. 헤매고 더뎌도 괜찮을 것 같다. 20년 전 받아들이지 못한 건, 내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 지금은 그가 밉지도, 부럽지도 않다. 고맙다. 20년 후 다시 만날 때, 나는 달라져 있을까?
탱크 앞에서 사람은 가벼운 존재다. 하지만 때로는 육중한 무게를 작은 몸으로 견뎌내기도 한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훠이훠이 날 때. 영화 <프라하의 봄>(필립 카우프만,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