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할 때, 멀리하고 싶은 차들이 있다. 모래가 떨어지는 트럭, 예측 불가능한 초보 운전(도로 연수) 차. 또 술 먹은 듯 비틀비틀하거나, 바람처럼 질주하는 과속 차. 후자의 경우 개인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 전자는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잘 실어도 흐르고, 아직 기술이 부족해 그런 걸 어떡할까. 갑자기 차타령을 하는 건 앞서 쓴 ‘비극의 주문, 난 너와 달라’ 때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리뷰에 극한의 폭력이 ‘난 너와 달라’라는 차별의식에서 나온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극한 대립 또한 상대를 ‘빠’나 ‘부대’로 호명하고 차이를 부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을 찾으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마다 삶의 모습이 원래 다른 것과 그걸 내가 받아들일 능력이 안 된다면 어쩌지?
고슴도치와 토끼 새끼 얘기가 있다. 두 새끼가 같이 놀려고 하는데, 고슴도치가 자꾸 토끼를 찔렀다. 토끼가 “찌르지 마, 찌르지 마” 말해도 멈추지 않자, 화가 난 토끼는 커다란 가시를 들고 와 고슴도치 등을 찔렀다. 그때 배시시 웃으며 고슴도치가 하는 말, “엄마야?!” 오래전 이 농담을 듣고 엄청 웃으면서도, 나도 새끼였기에,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다 헤아리지 못했다.
토끼와 고슴도치는 다르다. 가까워질수록 토끼는 상처 받는다. 고슴도치의 잘못은 아니다.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으니. 가장 현명한 방법은 각자 자기에 맞는 새로운 친구를 찾는 것. 사람도 마찬가지다. 같이 지내려고 하다가,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나고,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면, 이별하는 게 현명하다. 곁에서 욕하는 것보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으니, 멀리서 무관심한 게 낫다.
사회적 거리두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어쩌면 영원히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난 너와 달라’라며 때리기보다, ‘넌 나와 달라’하며 그냥 내버려 두는 것, 평화의 주문이다. 사람과 세상은 변하니, 그렇게 거리 두고 살다 보면, 서로 이해할 날도, 다시 만날 날도 오겠지. 안 와도 상관없다. 어차피 내 인생, 선택도 책임도 내가 지면 그만. 싸우는 것보다 나쁜 건 없으니.
운전할 나이가 되면서 길 위에서 뿐 아니라 인생의 길 위에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져 욕할 일이 많이 생긴다. 내 갈 길 잘 가는 것과 사회적 거리두기만이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