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다. 모내기 2일 차. 스무 살부터 탈모를 겪고 있는 나는 바람이 머리에 스치는 걸 싫어한다. 삶의 모토 중 하나 ‘평정심’, 하지만 내 소중한 머리는 너무도 쉽게(웃기게, 슬프게) 평정심을 잃는다. 히어로즈 야구 모자가 벗겨질 정도로 바람이 부니, 논도 난리다. 홍해의 기적처럼 한쪽에 물이 몰리고, 어린 모는 논에 닿자마자 수면을 침대처럼 눕는다.
첫날부터 조금씩 말썽이던 이앙기도 문제다. 한 번 지나가면 6줄의 모를 심는데, 틈틈이 한 줄씩 빼먹는다. 그러면 50미터 길이의 논에 들어가 일일이 모를 꽂아야 한다. 힘든 것도, 허리가 아픈 것도 그렇지만, 뭔가가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마음이 무척 어지럽다. 못자리할 때도 벼 종자가 섞여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는데, 그 속에서 홀로 괴로워하는 내 모습이 싫었다.
후, 어차피 해야 할 일, 좋은 마음으로 하자. 이럴 때 필요한 건? 음악! <복면가왕> 주윤발이 부른 ‘흰수염고래’(원곡 YB)를 틀었다. “작은 연못에서 시작된 길 바다로 바다로 갈 수 있음 좋겠네 (…) 너 가는 길이 너무 지치고 힘들 때 말을 해줘 숨기지 마 넌 혼자가 아니야” 코로나19로 지쳐있는 우리 가족에게, 나 학창 시절에 그랬듯, 힘 솟게 하는 주윤발은 영웅이다.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왜, 뭔가, 안 되는 걸, 이토록, 싫어할까. 시행착오를 두려워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빨간색 빗금이 그어진 시험지.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틀리는 걸 싫어하게 만들고, 그 습성이 일상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틀려도 괜찮은데, 다음에 잘하면 되는데, 나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해주지 못했다. 주윤발을 좋아할 때는.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10년을 지으며, 인생은 시험이 아니란 걸 알았다. 틀리면 고치면 되고, 일 더 하면 된다. 괜히 자신을 괴롭힐 필요 없다. 흰수염고래가 물이 차다고, 물살이 세다고, 크릴이 맛없다고 짜증 내진 않을 테니. 나쁜 날이 있으면, 좋은 날도 있다. 노래를 부르며 힘을 내자. 엄청 불러대 ‘흰수염고래’를 마스터하기 직전인데, 아내의 표정은 왜 좋지 않을까?!
지난 일요일 <복면가왕>을 보고 아들과 나에게 걱정이 생겼다. ‘방패’란 가수가 등장했는데, 노래를 너무도 잘한다. 긴장하는 녀석에게 말했다. “주윤발이 떨어져도 괜찮아. 최선을 다하면 되지 뭐.” 그 후로 꼬마는 시시때때로 말한다. “주윤발이 떨어져도 나 안 속상할 거야.” 그리고 주문을 외듯 ‘스물다섯, 스물하나’(원곡 자우림)를 끝없이 부른다. 여섯 살짜리가.
이앙기가 빠져나오지도 못하는 곳이었지만, 사람이 들어가 기어이 끝을 보았다. 허벅지까지 빠져 고된 일이었지만, 함께 하는 이들이 웃으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