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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효원 May 06. 2020

기록되지 않은 기억

<월-E>(앤드류 스탠튼, 2008) ⓶

월-E와 이브가 몸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과 반대로 700년 뒤 인간의 몸은 서로 멀어지기만 한다. 지구의 존재를 잊고 거대 우주선 AXIOM호에서만 생활하는 이들은 안락한 의자에 앉아 삶의 모든 걸 해결한다. 덕분에 700년 후 인간 세계에는 뚱보와 뚱뚱보만 존재하게 된다. 의자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뚱보와 뚱뚱보들은 서로 가까워질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저 스크린을 통해 데이트를 즐기고, 허상이 제공하는 애틋함을 통해 사랑이란 욕망을 채운다. 생명이라는 이름의 지구를 쓰레기 더미에 넘겨주고 우주로 향한 인간들에게 더 이상 ‘생명력 넘치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들에게 월-E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처럼 혁신적인 인물이다. 네오와 월-E는 허상에 사로잡혀 있는 인류를 구원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물론 그 양상은 다르다. 네오가 강한 정신력으로 인류를 구원한다면, 월-E는 각종 몸개그(?)로 몸의 매력을 인간들에게 선보인다. 한 뚱보, 뚱뚱보 커플은 월-E와 이브가 우주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며 기계가 제공한 사랑을 넘어 충동의 세계로 점프한다. 또 우주선 선장은 태초에 몸이 창조된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궤도를 벗어나 용감한 첫걸음을 내딛는다.      


우리는 감정과 기억을 기계에 담아두려고 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스마트폰 카메라를 꺼내고, 그 기억을 메모리, SNS에 쉴 새 없이 쌓는다. 그런데 자주 볼 것 같은데, 자주 보게 되지 않는다. 또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남겼는데, 또 다른 영원한 것에 치여, 순간의 것으로 전락한다. 내가 관심 갖지 않는 나만의 추억은 수많은 이의 것과 다를 것이 하나 없는, 보통의 것이 된다.     


이 글은 2008년 쓴 걸 수정한 것이다. 글감은 많은데 몸이 바쁘고, 마음이 어지러워 새로운 글쓰기는 힘들고, 안 쓰기는 허전해 예전에 썼던 것을 올리려 했는데…. 그때도 나는 이미 몸의 중요성과 기록을 위한 기록의 의미 없음을 알고 있었는데, 지난 12년 왜 이렇게 살았지? 새삼 몸만 아는, 기록되지 않은 기억도 좋다고 느껴졌다. 이제 편하게 쓰고, 편하게 쓰지 말아야지.


내가 나를 다 안다고 할 수 없으나, 적어도 이 우주에서 나만큼 나를 아는 '사람'은 없다. 괜히 사람들 말에 혹하거나 상처받지 말자. 얘처럼 더 넓은 세상에 모험을 떠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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