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탁의 전설들이 모인 성탄절 파티,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나타나 게임을 제안한다. ‘나 녹색의 기사에게 칼을 휘둘러라. 그리하면 이 도끼를 주겠다. 단, 1년 후 오늘, 내가 당한 대로 똑같이 갚아주리라.’ 모두 망설이고 있을 때, 원탁을 넘은 이는 가웨인(데브 파텔). 신화가 필요했나? 아니면 1년 후를 상상치 못했나?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 채 무대에 던져졌다.
1년은 금방 흘렀다. 사람들은 영웅을 노래하지만, 술 취하고 싸우는 게 그의 일이다. 찬 바람 불고 영웅은 길을 나선다. 아니 나서야만 한다. 기사는 약속을 어길 수도,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다. 하지만 말 위에 올라탄 이는 겉모습만 크고 화려한, 아직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두려운 어린애. 녹색의 기사는 둘째 치고, 그를 만나러 가는 여정이 험난하기만 하다.
이 작품을 본 건 밤 11시. 그날 낮 7세 아들과 <블랙 팬서>를 잠깐 봤는데, 액션 장면에 아이는 ‘저거 진짜야?’라며 무서워했다. ‘아이는 아직 영화와 현실을 분리하지 못하는구나. 인생이라는 것이 어머니를 시작해 평생 세상과 분리하는 과정’이라 느꼈다. <그린 나이트>를 보며 그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가웨인의 여정은 나와 세상의 분리하는 즉, 죽음을 향한 과정이다.
* 삐삐. 스포일러 출현 경고!
영화는 비유와 상징이 가득. 다소 난해하지만, 혼자 상상하기 좋아하고, 인생에 대한 질문 던지기를 좋아하면 꿀잼. 철학하기 좋은 영화.
온갖 고난을 겪고, 진정한 기사로 성장하면 좋으련만, 참 꾸준히도 어리다. 자기가 가고 있는 길이 어딘지도 모르고, 중간에 만나는 이들이 누군지도 모른다. 누가 기사 대접해주니 좋아라 하지만, 결국 죽기 싫다는 속내를 드러낸다. 녹색의 기사 앞에서 몇 번 머리를 뒤로 빼다, 결국 내빼는데, 그 장면이 그렇게 시원할 수 없다. 살고 싶다고 말도 못 하는 게 얼마나 힘들까.
고목에 이끼가 낀 모습을 한 녹색의 기사는 시간을 상징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따라가야 하는 시간의 강, 그리고 그 끝에서 피할 수 없는 육중한 도끼날. 도망치면 칠수록 번뇌와 오욕만 쌓이는 것을 알면서도, 녹색의 기사 앞에서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다만, 전설이 되지 않더라도, 내가 거짓말하지 않고, 어디에 있는 줄 알면 조금은 당당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