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있다는 것을 ‘당연히’ 믿었다. 어려서 그렇게 배웠고, 그곳에 가야 마땅한 놈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이 활활 타오르고, 괴물이 있는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잔인하기도 하고, 너무 유치하기도 하고, 혹시 내가 가게 되면 어쩌나 싶기도 해서. 그냥 지옥이 어떤 곳인지도 잘 모른 채, 아니 전혀 모른 채,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확신했다.
<오징어 게임>에는 여러 층위의 지옥이 나온다. 게임에 실패하면 죽는 곳이 지옥이고, 살아남기 위해 서로 증오하는 것이 지옥이다. 그 사람들은 왜 지옥을 ‘선택’했을까. 그들이 이미 살고 있는 세상이 지옥이기 때문. 사실 현실과 게임이 그리 다르지 않다. 그들은 이미 빚쟁이들에게 쫓겨 신체포기각서를 썼고, 무시와 증오 속에 살고 있으며, 무엇보다 희망을 볼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지독하게 불평등한 세상이다. 어떻게 돈이 없다는 이유로 지옥에서 살아야만 하나. 돈이 없어 힘들게 사는 것도 억울한데,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어디 쉴만한 곳 하나 없으니. 다행스럽게도(?) 작품은 지옥을 단순히 없는 자들의 곳으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게임 속 지옥도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는 우리는 그들 또한 이미 지옥 속에 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하 은근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한 사람이 말한다. ‘돈이 아주 많은 사람과 아주 없는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알아? 재미가 없어. 돈이 많은 사람한텐 아무리 좋은 것도, 맛있는 것도, 모든 게 시시해지거든.’ 돈이 많아본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럴 것 같다. 모든 게 흔하니까. 그리고 모든 게 있는 사람에게 없는 게, 사람. 대부분의 (없는) 사람과 겸상하지 말라고 배웠고, 나머지는 경쟁자.
결국, 재미는 축 늘어진 체육복을 입고도 함께 놀 사람들이 있을 때 나온다.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했던 지옥의 정체가 환하게 드러난다. 지옥은, 어디에 있는 게 아니라, 아무도 없는 곳에 있다. 비극적 아이러니라면, 사람들이 홀로 돋보이는 삶을 위한 무한 경쟁을 한다는 것, 자아가 너무 강해 타인의 깊이(재미)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지옥 탈출을 모색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