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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효원 Oct 05. 2021

시(詩)여, 노래를 멈추지 마오

<일 포스티노>(마이클 래드포드, 1994)


날카로운 사람이고 싶었다. 기자로 글을 쓸 때, 예리한 시선과 단단한 논리로, 보는 이의 사고에 작은 균열을 내고 싶었다. 명예를 얻고자 함은 아니었다. 그저 그 균열이 사람과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시발점이 되기를 바랐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선 지금, 전반전에 썼던 전략이 틀린 것임을 알았다. 원치 않는(준비되지 않은) 이에게 균열은 상처이고, 폭력일 뿐이다.


<일 포스티노>의 마리오(마시모 트로이시)는 답이 잘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섬에 살면서 배를 못 타 어부가 될 수 없단다. 뭐 그럴 수도 있지만, 뭔가 초점이 맞지 않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런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은 것은 시(詩)다. 네루다(필립 느와레)의 시는, 은유(메타포)처럼, 은근하게 다가와 그의 눈을 반짝이게 하고, 심장에 불을 지폈으며, 입에 모터를 달아줬다.


시는, 나태주의 시 <풀꽃>에서처럼, 자세히 보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아무리 작은 꽃도 오묘한 색깔과 상상치도 못한 모양을 갖고 있다. 산에서 우연히 만난 벌레의 움직임은 그렇게 힘찰 수 없다. 작은 꽃, 벌레도 그런데, 하물며 사람은 어떨까. 웃는 게 안 예쁜 사람 없고, 달리기가 안 감동적인 사람 없다. 시인의 눈앞에 사람은 그렇게, 그렇게 아기로 변한다.


그 반대편에 종교와 정치가 있다. 둘은 거대한 이상에 초점이 맞춰져 작은 것들은 잘 보지 못한다. 신부는 네루다가 공산주의자니까 당연히 무신론자일 것이기에 결혼 증인으로 세울 수 없다고 한다. 표를 구걸하며 온갖 사탕발림을 하던 정치인은, 선거가 끝나자 공사 인부들을 다 철수시키는데, 식당이 그걸 위해 얼마나 준비했는지 관심조차 없다. 그저 하찮은 군상들….


남은 인생은 기자가 아닌, 시인의 자세로 살고 싶다. 그런데 온갖 주장이 난무하는 세상에 시인이 노래할 곳은 없다. 작품 속에서 마리오가 시종일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모두가 이기려는 곳에서 시인은 과연 사랑과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을까? 시인이 된다는 것은, 낭만이 아니요, 모진 지구에서 평범하게 살아남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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