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스티븐 크보스키, 2017)
다른 그림 찾기는 재밌다. 한참을 보다가 다른 게 보이면 신난다. 그 재미 때문일까? 우리도 일상에서 다른 그림을 찾는다. ‘너’와 ‘나’의 다른 그림, ‘이곳’과 ‘저곳’의 다른 그림. 그런데 ‘다른’이 ‘다름’으로 끝나면 좋은데, 어느덧 ‘틀림’으로 변할 때가 있다. 아니, 많다. 같은 사람인데, 시소에 비유하자면, 그 존재의 무게가 엇비슷할 텐데, 끊임없이 불균형을 찾고자 한다.
어기는 얼굴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 사실, 모든 아이의 얼굴은 다른데, 소위 말하는 보통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늦은 나이에 학교에 간 것도 이 때문이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소년을 따돌린다. 똑똑하고, 유머 넘치는 아이의 속살을 친구들은 보지 못한다. 아니, 볼 마음이 없다. 그를 괴물 취급하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긍정한다. 어기는 그들에게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어기의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을 찾는 아이들이 생긴다. 그들이 특별히 착한 아이들이라 그런 건 아니다.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 세계의 규칙이라면, 다름을 다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같은 그림 찾기’를 시작한다. 모두가 괴상한 가면을 쓰는 핼러윈을 좋아했던 소년은 가면을 벗을 용기를 얻는다.
무언가를 얻은 것은 어기뿐이 아니다. 그와 처음 가까워진 친구들은 반에서 주변에 머물던 아이들. 그동안 돈 많고, 빽 좋은 아이가 만들어 놓은 주류에 편입되지 못했다. 하지만 어기와 함께 세상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주류의 벽을 허문다. 다른 그림 찾기에 몰두하다 보면 결국 다 같아지지만, 다른 그림을 찾다 보면 우리는 각자 갖고 있는 개성(매력)을 만나지 않을까?!
지난 한 주, 평생 안 하던, 안 할 것 같았던, 도토리 줍기에 열을 올렸다. 산에 엎드려 오랜 시간 있다 보니, 산은 멀리서 보던 것과 전혀 다른 기운을 내뿜었다.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고, 흙색은 아름다웠으며, 바람과 나무가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는 마음을 평안하게 했다. 10년을 등에 지고 산 산인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만난 것 같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