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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효원 Dec 13. 2021

이렇게 살아도 괜찮지 않겠소

<자산어보>(이준익, 2021)


미움받는 사내 있다. 사람들은 그를 ‘사교’(邪敎)라 부르고, 그쪽에선 ‘배교’(背敎)라 부른다. 사내는 위태롭다. 정치적으로 갈지 자(之) 행보를 했으면 출세 대로를 갔을 텐데, 그는 주류를 벗어나 천주학까지 자유로운 사상의 행적을 그린다. 성리학과 어진 군주, 그리고 천주학을 보며 가슴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더없이 차갑고, 그가 갈 곳은 저 멀리 흑산도다.


정약전(설경구)은 강진으로 유배 가는 동생 정약용 앞에서 옅은 미소를 짓는다. 사람들이 자신을 조지는 것처럼 말을 쓰면 편할 텐데, 그의 마음 다 담을 말이 없다. 다행히 흑산도 사람들은 그를 깍듯이 대접한다. 비록 위태론 인물인 건 알지만, 어디까지나 양반이니까. 비록 양반이지만, 사람들을 대하는 게 살가우니까. 그의 눈에 삐딱한 시선의 창대(변요한)가 들어온다.


창대가 약전을 멀리했던 이유는, 성리학의 힘이 세던 때(1800년 즈음), 사교로 나라의 기강을 흔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창대가 바다에서 고된 물질을 하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것은, 양반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이다. 그런데 유배 온 인물과 얽혀 꼬이면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없다. 그는 성리학적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다.


위기는 곧 기회. 창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문장 앞에서 약전을 찾아간다. 둘은 일방적인 가르침, 배움이 아니라 서로 알아가며, 더없이 맑은 표정을 짓는다. 창대의 학문 소식이 널리 알려지고, 그는 아버지에게 호출을 받는다. 기회는 곧 위기. 창대는 정약용의 책 ‘목민심서’대로 백성을 사랑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언젠가 자신을 보는 듯 한 약전의 시선은 불안하다.


떠나기 전, 창대는 물었다. ‘사람에 이로운 책을 안 쓰고, 물고기 똥구녕 얘기만 쓰는 이유가 뭐냐고.’ 약전은 답했다. ‘누가 누구를 다스린단 말인가.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걸 알아버렸네.’ 이것이 약전이 진짜 위태로운 이유, 다시 부름 받지 못한 이유. 하지만 200년 후 나는 그를 보면서, ‘더 잘 살 이유 없음’을 배웠고, 위로를 받았다. 허, 이렇게 살아도 괜찮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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